윤민우 소설 <5화>
법전에 파묻혀 있다가도 고개를 돌려보면 웬 여자가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것이 아내에 대한 상징적인 기억이다. 그렇다고 아내가 전전긍긍 내 곁을 맴돌았던 건 아니다. 아내는 사범대학 출신으로,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방학이면 혼자서 갤러리를 순례하거나 짧은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아내는 개인적인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숨죽여 나를 지켜보았다. 아내가 현실적인 부분들을 전적으로 책임지던 시기였다. 우리에겐 아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내가 책임져야 할 현실이란 10년째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뿐이었다.
당시에도, 이후로도 나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고시에서 낙방했을 때 나는 인간적인 감정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내는 말했다. 결과가 어찌 됐건 자신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를 존경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아내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사치스러운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얼추 반년 전이었다. 아내는 멋스러운 흰색 블라우스에 크림색 스커트 차림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어서 눈부신 햇살이 그녀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짙은 선글라스가 그녀의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다란 잔에 담긴 상앗빛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시간 좀 지킬 수 없어요? 뜬금없이 당신이 먼저 보자고 해놓곤.”
“좋아 보이는군.”
“당신은 얼굴이 그게 뭐예요. 홀아비라고 쓰여 있잖아요.”
나는 웨이트리스를 불러 맥주를 주문했다. 아내는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눈가 주름이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 봤자 주름은 그녀의 눈매를 더욱 선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맥주가 도착했고 우리는 한동안 안부를 주고받았다. 누군가의 탄생과 죽음과 결혼에 대해. 주로 내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쪽이었다. 아내는 감정을 조율하듯 이따금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얘깃거리가 바닥나갈 때쯤 나는 상담원 일을 하면서 겪게 된 일화들을 끄집어냈다. 발코니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아내는 마치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역할이 정반대였다. 아내가 말을 쏟아놓으면 내가 그것들을 주워 담아야만 했다. 괜찮아 여보. 다 괜찮아질 거라고.
“거봐요. 얼굴 보고 얘기하니 얼마나 좋아요. 맨날 이 핑계, 저 핑계.”
“나쁘지 않군.” 내가 말했다. “몸은 좀 어때?”
아내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최근에 약을 바꿨어요. 하도 잠이 쏟아지길래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하지만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한다는 거.”
아내는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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