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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우 소설 <원피스>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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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우 소설 <6화>
아내를 만나고 난 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나는 지난 7년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영원히 끊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담배를 단칼에 끊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폐경기를 잘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울증이 아내를 덮쳤다. 아내는 말수가 줄어드는 대신 잠이 늘었다. 그럴수록 아내는 점차 현실감각을 잃어갔다. 어느 날 아내는 어린 제자들 앞에서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다. 아내는 장을 통제할 수 없었고, 교실에서 그대로 변을 봐버렸다. 아내의 퇴직과 입원은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입원 과정에서 울증이 조증을 동반했다. 심리치료와 약물치료가 병행되었다. 아내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증상에 대한 객관적인 원인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모든 것이 원인일 수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해가 될 만한 소지가 있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담배까지도.
나는 담배를 피우며 이삿짐을 꾸렸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엔 불필요한 공간과 기억들이 너무 많았다. 집은 아내와 내가 함께 이룬 유일한 결실이었다. 고심 끝에 나는 집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아내의 동의는 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심리적 타격을 입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룸에 세를 들었다. 그리고 남은 돈은 만약을 위해 통장에 고스란히 넣어두었다.
발코니 여자에게선 그 후로도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미용실에 취직해 막 돈을 벌기 시작한 참이었다. 금세 단골이 생길 테니 두고 보라고 그녀는 나에게 큰소리쳤다.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 머리도 부탁하겠노라고 그녀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헤어스타일에 관한 한 누구보다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내 농담을 칭찬했다. 그러곤 뜬금없이, 대체 사람의 취향이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혹시 자기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유별난 취향의 소유자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아직도 발코니 같은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이번엔 원피스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얼마 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연인〉이라는 로맨스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가 생각보다 야했다는 것 외에 그녀는 남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 그녀는 영화 속 여주인공이 입고 나왔던 푸른색 원피스가 몹시도 갖고 싶어졌다.
“시내를 이 잡듯 뒤졌어요. 푸른색이다 싶으면 덮어놓고 입어봤고요. 실제로 마음에 드는 것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와 입어보면 어딘가 달라요. 마치 반점 하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쌍둥이들처럼요.”
그녀는 십여 벌의 원피스를 환불받았다고 했다.
“매장에 그새 낙인이 찍혔어요. 입어보기만 하고 사가지는 않고, 사가더라도 도로 환불을 요구하니까요. 저도 이제 양보란 걸 배우게 됐나 봐요. 확실히 같은 매장에서 여러 번 환불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녀의 옷장엔 차마 환불받지 못한 푸른색 원피스가 세 벌이나 걸려 있었다.
“요즘은 매일 그것들만 번갈아가며 입고 있어요. 꼭 죄수들처럼요.”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간 소비에 대한 자신감마저 잃어버릴 수 있었다. 나중에 가선 껌 한 통 사는 일조차 나에게 조언을 구하려 들지 몰랐다.
“아가씨, 혹시 기회비용이란 말 들어봤습니까?”
내가 말했다.
“아뇨. 제발 어려운 말씀은 마세요.”
“쉽습니다. 무언가 선택을 내려야만 할 때, 보다 손해가 적은 쪽을 선택하면 되는 거니까요. 지금까지 잘해왔잖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아가씨가 어떤 선택을 내렸다고 해서, 포기한 선택의 가능성까지 함께 죽어버리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가능성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여름 밤의 모기처럼 그 가능성들이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죠. 아가씨가 본의 아니게 원피스를 수집하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가 찾고 있는 원피스가 어딘가에 틀림없이 존재하리란 가능성을, 아가씨가 놓지 않았기 때문이죠. 내 말에 동의하십니까?”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당분간은 아가씨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도록 해보세요. 물론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역시 아가씨의 선택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말인가요?”
“나빴던 것들이 좋아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누구나 변덕을 부리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이런 건 어떨까요. 한 번쯤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보는 겁니다.”
그 뒤로 나는 길거리에서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유심히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원피스에 얼마만큼 만족하고 있을까. 그러는 사이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한 사람씩 모습을 감추었다. 어느 틈엔가, 계절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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