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우 소설 <9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분지 상자를 끌어안은 채, 가능한 주위를 둘러보는 일 없이, 나는 그곳을 얌전히 빠져나갈 셈이었다. 그런데 출입문에 막 다다른 순간 상담원 하나가 나를 붙잡아 세웠다.
“선생님, 어떤 여자분께서 선생님을 연결해달라고 하시는데요.”
“그렇습니까?” 역시, 제대로 마무리를 짓는 게 낫겠지. “제 자리에서 받도록 하죠.”
나는 자리에 앉아 도로 전화선을 꽂았다. 그러곤 손짓으로 상담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화기 램프에 내선을 알리는 불빛이 깜빡였다. 나는 전화를 연결했다.
“저예요.”
뭔가 혼선이 빚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갑자기 불분명한 상황 속에 빠졌고,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여자임이 분명했다.
“당신이 어쩐 일이오?”
“어쩐 일이긴요. 그쪽에서 연락을 해오지 않으니 제가 하는 수밖에요.”
“하지만 여긴, 휴대전화로 걸어도 되잖소.”
“여보, 연말이에요. 크리스마스라고요. 제발 화내지 말아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놀랐을 뿐이지. 요즘은 어때? 지낼 만해?”
“지금 내 안부가 궁금한 거예요, 상태를 떠보는 거예요?”
“둘 다야.”
아내가 발작적으로 웃었다.
“그렇게 좋은 편은 못 돼요. 지금 짐을 꾸리는 중이에요.”
“어디 여행이라도 가나?”
“아뇨. 도망을 치는 중이에요. 또 일을 벌일까 봐요.”
아내는 과거에도 약을 먹는 일을 꺼렸다. 약에 의존할 때마다 자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치료로 아내는 한동안 삶의 균형을 유지했다.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판단한 아내는 의사의 동의 없이 무리하게 약을 끊었다.
“성탄절을 미치광이들로 가득한 병동에서 보내게 됐어요.”
“하지만 당신은 미치지 않았어.”
“나도 알아요. 미친 건 아마도 당신이겠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닥치리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10년 내내 같은 책만 보고 있었잖아요.”
“당신은 10년 내내 그런 나를 지켜봤지.”
“웃기지 말아요. 나는 그런 적 없어.”
“여보. 이러지 마. 내가 지금 당신한테로 가는 건 어때?”
“이런 망할 자식! 나를 직접 병원에 처넣으시겠다?”
“이봐,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내가 그리로 가지.”
아내는 절망적으로 악을 써댔다. 그러다 무미건조한 신호음의 장막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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