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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14 10:00 수정 : 2014.07.17 10:07

이주란 소설 <참고인> ⓒ이현경



이주란 소설 <1화>



1.

얼마 전에 나는 서른한 살이 되었는데 그냥 스물한 살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행동에 맞게 나이를 정했으면 좋겠다. 나는 뭐 하나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내가 뭘 써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그에게,

당신 얘기도 조금 들어가.

라고 말하자 그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오직 그의 이야기만을 써야지, 하고 결심했다. 어차피 그가 이 글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아 농담이었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그는 심심할 때만 내게 전화를 걸곤 하지 내 안부나 근황 따위는 묻지 않는다.

아무도 내게 안부를 묻진 않지만 내겐 하니가 있다. 하니가 있는 게 아니라 하니밖에 없다. 하니는 나랑 같이 사는 강아지인데 원래 내 개는 아니고 집주인이 맡기고 간 아이다. 세 살이고 사람으로부터 유기되었던 적이 있는. 집주인은 미국으로 떠나면서 내게 집과 하니를 맡겼다. 덕분에 나는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사이 집주인은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고 얼마 전 한국에 잠시 다녀가면서 당분간 더 이 집에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

독립을 하면서 나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30년 동안 살던 곳을 떠났다. 지금 나는 집 근처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뚱뚱하다. 시간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하루하루는 빠르게 지나갔고 돌이켜보니 길었다. 그동안의 시간은 내가 살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흘러간 것 같다. 말하자면 내 시간만 이상했을 것 같다는 것이다.

2.

집은 104평이었고 내 짐은 적었다. 아버지가 홈쇼핑으로 구입한 수납 박스 네 개로 충분했다. 원래 옷도 없고 뭣도 없지만 내 나름대로 저는 이 집을 탐낼 생각은 없습니다, 너무 제 집처럼 쓸 생각은 없어요라고 어필한 것이었다. 선배에게 받은 기타를 가져왔으나 두 번 정도 친 것이 전부다. 독학을 하기엔 음악적 재능이 없는 것 같고 학원에 다닐 돈은 없어 그냥 방치되고 있다. 없는 재능이 생길 일은 없고…… 자기 돈으로 기타 줄을 갈고 배송비까지 지불한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날 술값이며 택시비까지 모두 선배가 냈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일 리는 없지만 어쩐지 지금은 선배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민망할 따름이다. 짐을 최소화했는데, 저 기타 덕분에 내가 싼 짐은 결과적으로 최대화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짐이 된 것이다.

가져온 짐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빨래 건조대다.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면서 처음엔 속옷만 널 수 있는 작은 건조대를 살 생각이었는데 막상 배송되어온 것은 큰 건조대였다. 이 집에 들어오던 날 도우미 아주머니가 내게, 이사 오냐? 무슨 이런 것까지 챙겨 오냐?고 말해 나는 마치 이 집이 비길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사람처럼, 좋은 집에 못 살아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구나 싶어 얼굴이 벌게졌었다. 하지만 원래 이 집에 있는 건조대의 사용이 불편해 큰 건조대를 사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기 와서 처음 빨래를 하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거의 매일 하게 되었다. 하루는 빨래를 하고 하루는 마른빨래를 개키고 하다 보면 매일 빨래와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빨래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보면 빨래를 하고 앉아 있었다. 정말 빨래를 한 다음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고 웃기고 앉아 있네에 쓰이는 앉아 있다다. 라디오에서 모든 증상은 가면을 쓴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을 들은 뒤로 내가 한번 입은 옷은 무조건 빤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어떤 증상의 가면인지는 모르겠다. 알게 된다고 한들 지금보다 빨래를 적게 하게 되는 것 말고 내 인생의 무엇이 더 좋아지는가? 이런 태도로는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조차 받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까 애초에 나같이 멍청하고 나약한 인간은 의식이라는 단어도 쓰지 말아야 한다. 나는 빨래를 널어놓고 자주 언니의 메일을 다시 읽는다.




이주란(소설가)





이주란

1984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2012년〈세계의문학〉신인상에 단편소설〈선물〉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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