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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17 09:56 수정 : 2014.07.22 10:09

이주란 소설 <4화>



6.

주연아.

아직 전화를 할 수는 없는 거니? 목소리 듣고 싶다. 여긴 벌써 초여름 날씨야. 얼마 전엔 때아닌 폭우가 며칠이나 내리기도 했어. 장마처럼 말이야. 작년에도 그랬던 것 같아. 막상 여름엔 비가 별로 오질 않아 농사짓는 사람들이 정말 힘들었잖아. 수확할 때 되면 또 자기 맘대로 쏟아지고. 그러고 보니 왜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날씨 얘기부터 하는지 모르겠어. 어디서 그렇게 배웠나? 너무 뻔하잖아. 하지만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해도 될 것 같아. 재작년부턴가 3, 4월에도 눈이 내리질 않나, 5월인데 8월처럼 덥질 않나, 날씨가 엉망이 되어버린 거 기억하지? 아무도 기상청을 믿지 않고 말이야. 올해는 더 심한 것 같아. 언니도 30년 넘게 사계절을 겪어왔는데도 이토록 적응이 안 되는 걸 보면 인간이란 것도 참 우스워.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다. 답장에 태명 안 적었더라? 확 주연이라고 해버릴까 보다. 그러면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알지? 언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기서 많이 힘들고 외로울 걸 알아. 눈물이 날 때면 호주에 있는 너 자신을 두 번째 너라고 생각해. 진짜 너는 여기 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쁜 감정들이 사라질 거야. 실제로 언니는 아홉 살 때 어머니와 같이 시장에서 돌아오던 날 이미 죽었단다. 그 후의 삶은 마치 보너스 같아서 조금만 좋은 일이 생겨도 웃음이 나는 거야.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거지. 어때? 언니처럼 한번 생각해볼래? 언니가 네 옆에 있었다면 너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언니를 위해서 한번 노력해줄래? 넌 비관적인 편이라 쉽진 않겠지만.

아기도 잘 자라고 있다고 하고(딸인 것 같아) 형부도 아버지도 모두 건강해. 우리 걱정은 말고 널 잘 챙겨. 특히 몸 간수 잘하고. 외국인과는 사귀지 않길 바란다만 혹시 사귀게 된다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줘. 궁금하긴 하다. 거기가 정말 그렇게 큰지.

7.

외국인은커녕 한국인조차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나에게 언니는 두 번째 메일을 저렇게 끝맺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사귄 한국인은 내게 세 번쯤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 번은 만우절이었고 한 번은 술에 취해서였고 한 번은 내가 데이트 비용을 전부 지불한 날이었다. 아무리 내가 낙지를 좋아한다 해도 낙지 한 마리에 사만 원을 내고 싶진 않았는데…… 뭐 아무튼…… 그래도 듣긴 좋더라. 고백하자면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감정 없이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그는 자꾸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를 부담스러워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그저 알콩달콩하고 싶어서 말한 것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사랑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이상해서 나 자신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자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한다는 게 뭔데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 친구들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고 나는 내가 사랑을 느끼는 기준 같은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으니까. 30년을 살게 되면 사랑에 빠지는…… 그런 일쯤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라 생각했는데 내 경우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걸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쉽게 사랑에 빠지기도 하던데.

8.

평소와 다름없이 통화를 하던 중에 그가 나를 찼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평소와 달랐던 것 같다. 그날 그의 목소리와 대화에서 나는 이별을 감지했다. 두려웠다. 두려워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화기를 붙잡고서 두서없이 애걸복걸하다가 끊고 말았다. 말하자면 전화가 끊겼다. 지금 생각하니 어떤 면에서는 웃기기도 하다. 실제로 나는 혼자 그 생각을 하다가 소리 내어 웃기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내가 나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웃지만 당시엔 할 말을 다 못 했다는 게 억울했다. 늘 그렇지만 담담하려 하면 할수록, 나는 솔직해지고 말았다.

몇 없는 친구들을 모아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자 눈물이 났고, 그러자 보통 여자가 된 것 같아 슬쩍 기분이 좋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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