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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18 09:48 수정 : 2014.07.22 10:09

이주란 소설 <5화>



9.

차이긴 했지만 좋은 기억을 떠올려보자. 사랑한다는 말 말고…… 예쁘다는 말도 들어봤다. 나는 자주 그 순간들을 되새긴다. 수십 번 생각한 거라서 누군가 물어본다면 숨도 안 쉬고 아주 빠르게 말해줄 수도 있다. 그중 한 번은 내 생일 즈음이었다. 체리색 염색약으로 집에서 염색을 했는데 하고 나니 검은색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인가 열흘 만에 만난 그는 내게 예뻐져서 왔네라고 말했다. 그 생각만 하면 고맙다. 물론 못생겼다는 말은 수십 번도 더 들었지만.

이제 진짜 담담해진 후라 하는 얘기지만…… 그러니까 독립을 하게 된 데는, 사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안 그래도 연애를 한 번밖에 못 해봤는데 그마저도 4년 만의 연애라 나도 모르게 기대가 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게 끝났다는 생각에 잠시 자존감을 잃었던 것 같다. 전부터 틀어진 관계였는데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붙잡았다가 모진 소릴 들었던 것이다. 미련했단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휴대전화에는 그와의 통화가 일곱 차례나 녹음되어 있었다. 내 볼이 우연히 녹음 버튼을 눌렀던 모양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억지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내 목소리는 조금 불안하게 들렸다. 대화 주제를 맞추고 맞장구를 치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30년을 산 여자의 불쌍한 목소리. 그것이 진짜 나인가? 나는 그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던 게 나라는 게 싫었고 그러자 한 인간으로, 말하자면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족에 기대서는 그게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물리적으로 혼자가 되어야겠다고 느꼈다. 지금부터 노력해도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조급함까지 더해졌다. 마치 나 자신이 아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30년이나 살아서 이 모양이니 마치 처음부터 새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과는 다르게 30년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런 인간으로 자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같은 집에서 한 살 터울로 자란 언니는 저렇게 밝은데? 물론 셀프카메라를 너무 많이 찍는 것도 병이라지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나는 나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혹시 노력하면 언젠가 나는 지금과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엄청난 노력을 하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도대체 어떤 노력?

10.

안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할게. 얼마 전에 아버지가 다리를 다치셨어. 말씀을 많이 안 하셔서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조합원 사람들하고 낚시를 갔다가 거기서 또 몇몇 사람들을 만난 모양이야. 오랜만에 배를 탄 데다 고기도 많이 잡고 신났다고, 매운탕을 끓여 먹고 가겠다고 전화한 게 오후 1시쯤이었나? 8시가 넘도록 안 오시기에 진짜 신나셨나 보다 했었어. 그러다 9시 좀 넘어서 병원에서 전화가 온 거야. 급하게 형부랑 병원으로 갔더니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사인을 하라는 거야. 발목을 절단했어. 대지도 선착장에서 가까운 산 아래 공터에서 지뢰를 밟았다는 거야. 오늘 오전에도 기자 둘이 다녀갔어. 게다가 그때 일어난 싸움 때문에 사람 하나가 죽었는데, 아버지를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한 거야. 아버지는 엄청난 실의에 빠져서 소환에 불응하고 자꾸 술만 찾아. 형부가 말려도 소용이 없고…… 언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서 미안해. 네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괜히 걱정만 할까 봐 너 모르게 해결해야지 생각도 해봤는데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덕순이 언니네 강아지 다리 하나 부러졌을 때도 울던 너니까. 근데 그 발목지뢰가 신기한 게, 진짜 딱 발목까지만 날아가더라?

11.

하루 종일 남자 생각만 하는 내게 언니의 메일이 왔다. 호들갑 좀 떨지 마, 언니. 지뢰가 아버지만 봐줄 리가 없잖아.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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