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란 소설 <8화>
18.
어쩐지 일이 잘 되지 않았다. 학원 일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 정신이 딴 데 가 있으면 일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아이들이라지만 엄연한 인간이고 생각보다 어른 같은 애들도 많았다. 인간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운 듯했다. 오늘은 그런 애들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아이들이 들어오면 인사를 하고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는지 봐야 했는데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어서 아이들이 들어와도 그 애를 보면서 이름이 뭐더라, 하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일대일로 앉아 있는 상황이라 몇 초만 말이 없어도 아이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선생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어…… 그래 보여?
네. 왜 그러시는데요?
오늘따라 못생겨서.
똑같으신데요?
알지. 그래도 기분이 그런 날 있잖아.
전 아직 그래 본 적 없는데요, 저희 엄마가 자주 그래요.
엄마?
네. 그래서 성형수술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외할머니가 니 기분 탓이지 남들이 볼 때는 똑같다고, 하지 말라고 그러세요.
…….
그러니까 선생님도 기분 푸세요.
그래.
나는 그 애에게 진심으로 많이 고마웠는데 나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 했다. 우리가 선생님과 학생 사이라는 점, 21년을 더 산 내가 위로를 받았다는 점, 그런 말이 왜 내게 그렇게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등으로 인해서. 그 애는 종종 거북이가 좋다거나 꿈이 소설가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 애를 가르치다니.
오후 3시가 지나자 차차 정신이 들어서 정상인 척 아이들과 수업을 했다. 와야 할 아이가 오지 않았고 새로운 아이가 왔다. 차가운 물을 정말 많이 마셨는데 화장실엔 몇 번 가지 않았다. 퇴근을 하고 집 근처 공원을 걸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다. 그 애에게 나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던 것 같다. 타인의 눈에 내가 사는 모습 그대로가 보인다면 나는 정말 예뻐 보일 수가 없겠구나 싶어 절망했다. 그리고 내가 똥까지 닦아준 아이가 그만둔다는 말을 전해 들은 오후 4시를 복기하면서 그 애가 도대체 왜 그만둔다고 했을까 오래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나 때문은 아니겠지? 나는 불안했다.
19.
자기 전에 전활 걸어 그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왜 전화했냐.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내 목소리 싫다면서. 응. 근데 오늘은 듣고 싶네. 참 나. 그는 끝에 혀를 찼다. 별 그지 같은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돌아와주기만을 바랐었는데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20.
내가 손이 많이 가지 않을 것 같아서 좋다는 그의 말을 들은 후로, 그에게는 어쩐지 내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도 뻔히 힘든 일이 있을 텐데 싶었고 그가 그런 얘길 나에게 잘 하지 않는 편이어서 나도 그런…… 어떤…… 이를테면 어른같이 행동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이 섭섭하면서도 좋았다. 또 다른 이유도 있긴 한데, 그가 원래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 듣는 편이 아니어서 그 내용이 어떤 슬픔과 관련된 것이었을 땐 위로는커녕 실망과 섭섭함이 커져 쓸데없는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글 같은 걸로 고백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버지. 그래도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네요.
21.
그래. 사실 언니는 너에게 화가 나 있어. 네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넌 마치 내가 힘들길 바라고 있었던 사람처럼 구는구나. 아버지가 구속되고 니 조카가 잘못되기라도 바라는 거야? 몇 달 동안이나 도대체 왜 말이 없는 건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아. 하기 싫으니까 안 하는 거겠지. 그런 거야. 다른 말들은 전부 핑계일 뿐이지. 나 같으면 호주가 아니라 북한에 있다고 한들 지뢰밭을 지나 임진강을 건너서라도 아버지와 너에게 갔을 거야. 알아듣겠니? 니가 어떤 앤지 알겠어? 총살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난 강을 건넜을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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