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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소설 <높은 물때>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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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소설 <1화>
이 집의 부엌과 거실로 이어지는 벽면에는 ‘sto distruggendomi’라는 문장이 칼로 새겨져 있었다. 칼자국이 마모된 상태로 보아 수백 년은 더 되었으리라 추정만 할 뿐 쓴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문장이었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은 13세기에 건물이 지어진 이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집을 거쳐갔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머물렀다 떠나간 이들에 대해 확언할 수 있는 바는 이제 그들이 모두 죽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죽을 때 철저히 혼자였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물론 기록이 남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은 아니다. 베니스의 한 구립 도서관에 비치된 먼지 쌓인 향토사책 속에는 지금은 여러 가구가 나눠 살고 있는 이 건물 전체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조반니 마리아 첼리니의 저택으로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문서에 따르면 조반니 마리아 첼리니는 당시 지중해 동부와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무역상이었다. 그의 집 앞, 에메랄드 빛 물이 흐르던 운하에는 그의 수많은 배가 정박해 있었는데 배 위에는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언제나 가득했다.
사실 부유했던 것이 조반니 마리아 첼리니만은 아니었다. 십자군 원정에 의해 동방무역이 확대된 이후로 도시는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웠다. 오래전, 베니스 공화국의 건국신화를 화려한 6운각 시문으로 찬양한 시인은 그즈음의 베니스를 오색 빛이 휘황한 보석함에 비유했다. S자 운하가 가로지르는 시가지는 금박 장식의 석조 건물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리알토 다리에서 산마르코 광장까지 이어지던 향수 가게에서는 온갖 감미로운 향들이 당시 유행대로 노란색 비단 가발을 쓴 여인들을 유혹했고, 골목마다 환전상들과 금세공사들이 줄을 지었다. 1년에 한 번 도시에 커다란 축제가 열릴 때면 양탄자와 꽃으로 장식한 배들이 운하를 가득 메웠다. 황금 수를 놓은 깃발이 지중해의 온화하고 향긋한 바람에 펄럭였고, 연고와 향수로 단장한 색색의 노새들은 갑판 위에서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가면 뒤에서 기꺼이 방탕해졌다.
베니스가 축적했던 부는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동인도로 가는 뱃길이 발견되고, 캉브레 동맹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인구를 반이나 앗아간 페스트와 나폴레옹 1세의 침략도 도시를 소멸시키지 못했다. 조반니 마리아 첼리니는 그의 저택 2층 오른쪽,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가 하녀의 엉덩이를 만지기 위해 병풍 뒤로 숨어들었던 응접실 자리에서 먼 훗날, 극동의 분단국가에서 온 부부가 불법 민박을 운영할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머리라도 좀 잘라야겠어.” 윤이 말했다. “수염도 좀 깎고.” 윤은 식탁 앞에 앉아 인상을 찌푸리며 제를 바라보았다. 제는 턱 밑의 수염을 오른손으로 만졌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탓에 덥수룩해진 수염에는 빵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머리를 깎거나 면도를 한 것이 언제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제는 윤을 보았다. 윤의 번들거리는 얼굴 위에는 실수로 붓을 떨어트려 사방으로 튄 물감 자국처럼 기미가 가득했다. “넌 뭐라도 좀 찍어 발라.” 윤은 기분 나쁘다는 듯 입을 씰룩거리며 식어빠진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2시였다. 그들이 들이닥칠 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지만, 지난 세월의 흔적을 지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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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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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2011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 단편소설〈거짓말 연습〉이 당선되었다. 소설집 《폴링 인 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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