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 <2화>
제는 느릿한 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산타 루치아 역 앞으로 나갔다. 윤이 멋대로 머리카락을 너무 짧게 잘라 뒷목이 서늘했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제는 끊임없이 속으로 귀찮게 됐다고 되뇌었다. 정말 귀찮게 되었다. 산타 루치아 역 앞 광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에는 더러운 비둘기들이 함부로 날아다녔다. 역 앞 광장에 다다르자 약속 장소인 관광안내소 앞의 젊은 아시아인 남녀가 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아이는 서서 여행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여자아이는 트렁크에 기대어 앉아 까딱거리며 발장난을 쳤다. 남자아이가 무슨 농담을 했는지 여자아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치게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에 제는 낭패라고 생각하면서, 귀찮게 되었다고 한 번 더 뇌까렸다. 남자아이는 제에게 보낸 메일에서 자신의 이름이 준오라고 소개했다. 아주 흔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희귀한 이름도 아니었다. 준오라는 이름의 아이를 알고 지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그 탓일 수도 있었다. 준오는 그가 제와 같은 과 후배이며 제에 대한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준오가 열거한 이름들은 제 역시 알던 후배들의 이름이었다. 그 때문에 비록 기억 속에 없었지만 준오라는 아이가 자신의 후배인 것만큼은 사실 같다고 제는 생각했다. 준오는 휴학 중이며 과 후배인 여자 친구와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데 베니스에 들를 것이라고 말했다. 메일의 끝에는 선배님을 꼭 만나 뵐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라고도 썼다. 제는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윤의 생각은 달랐다. 윤은 누구든 간에 오겠다는 사람을 마다할 때냐고 비난하는 투로 말했다. 가뜩이나 비성수기라 수입이 전무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작년 여름 성수기 때 예년만큼의 수입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하냐고도 다그쳤다. 물론 제도 기억했다. 작년 여름에는 심각한 가뭄으로 쓸 수 있는 물의 양이 턱없이 부족해 관광객들을 많이 받을 수가 없었다. 물의 도시라는 도시의 별칭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후배라는데 돈을 받을 수나 있겠냐, 고 생각하면서도 제는 더 이상 윤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제는 모든 것이 다 귀찮았고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넷이라는 준오와 미영이란 이름의 스물한 살짜리 여자 친구는 제를 보고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20일간의 여행 중 마지막 여행지라고 했는데도 그들은 그다지 피곤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준오는 키가 제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건장한 체격으로 머리카락을 새빨갛게 염색했다. 미영은 귀여운 타입으로 웃으면 볼에 보조개가 팼다. 그들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트렁크를 끌며 제를 따라 걸었다. 트렁크의 바퀴가 돌로 된 길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준오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제를 향해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른다는 둥,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둥의 인사말을 크게 늘어놓았다. 제는 슬리퍼를 끌듯 앞서 걸으며 담배나 한 대 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낙서가 많은 건물 벽 옆의 좁은 계단에 접어들자 물비린내가 났다. “역시, 베니스는 물의 도시라더니 운하가 있네요!” 준오는 무엇에든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행객처럼 말했다. “여기야.” 제는 운하 옆 낡은 건물의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서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너희는 여기서 초인종을 세 번 눌러. 그럼 우리가 열어줄 거야. 꼭 세 번 눌러야 해. 잡상인이 많아서 한두 번 누르면 안 열어주니까.” 준오와 미영은 제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는 몹시 피로했다.
제의 아파트는 2층에 위치해 있었다. 복도에는 등이 있었지만 어두침침했고, 몹시 낡은 계단은 더러웠다. 누군가가 버려둔 자전거는 계단참에 녹슬어 있었다. 준오와 미영은 가방을 들고 힘겹게 좁은 계단을 올랐다. 미영의 트렁크를 들어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머리에 스쳤지만 제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2층에는 양옆으로 문이 두 개 있었고, 제의 집은 그중 오른쪽이었다. 제는 페인트가 벗겨진 붉은 문을 열었다. 문소리에 윤이 느릿한 걸음으로 주방에서 나왔다. 집 안은 어딘가 바람이 새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늘했다. 투숙객이 올 때마다 윤이 끓이는 보리차의 냄새가 축축하게 온 집 안 곳곳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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