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 <3화>
이 집에 처음 입주하던 날 현관문을 붉게 칠한 것은 제였다. 그 무렵 제가 작업했던 모든 미술 작품에는 붉은색이 등장했다. 그것은 제가 오래전 처음 보았던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처럼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이었다. 그때 제는 베니스에 비엔날레를 보러 왔었다. 지도교수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제자라 하더라도, 먼 유럽까지, 그것도 학부생이 교수와 동반하는 경우는 학과가 생긴 이래 없었다. 그만큼 제가 받았던 대우는 파격적이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받는 특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같은 학과 내에 제를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누구도 대놓고 제에 대한 험담을 할 만큼 배짱을 갖지는 못했던 것이다.
제는 지방의 소도시 출신으로 일찍부터 그 도시에서 열린 대부분의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휩쓸었다.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부모를 둔 것도 아니었고, 이름난 미술 선생에게서 미술을 사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도시 사람들은 제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 미술 선생은 그에게 전국대회에 참가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미술 선생은 젊었고 의욕이 넘쳤다. 그는 전국대회에서도 대상을 거머쥐었다. 3년 뒤, 그는 국내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미술학도들이 입학한다는 대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늘 주목을 받았다. 지도교수는 비엔날레를 취재하러 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한국 미술계의 스타가 될 것이라고 제를 소개했다. 교수가 제에 대해 길게 했던 말들은 지면 부족 탓에 단 한 줄로 요약된 채 사라지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그 모든 일은 제가 스물다섯이 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는 이듬해 졸업을 했고 그 뒤 대형 캔버스에 물감을 입체적으로 수없이 덧칠한 뒤 금속과 거울 조각을 붙여 만든 기형적 건축물 그림들로 주목을 받았다. 그가 뉴욕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겠다며,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현지 전시기획자를 찾아 베니스에 다시 온 것은 스물여덟 살 때였다. 그리고 그때 그는 윤과 함께였다.
준오와 미영은 부산스럽게 집 안을 둘러보았다. 준오는 넉살 좋게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하더니 윤이 머뭇대는 사이 “형수님, 물 좀 마셔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집에는 거실로 쓰이는 진녹색 벽의 방 이외에 방이 세 개 더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커플룸이었고 나머지 두 방에는 2층 침대가 각각 두 개, 세 개씩 놓여 있었다. 성수기에는 보통 모든 방이 만실일 때가 많았고, 그럴 때 윤과 제는 부엌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그렇지만 비성수기에는 방이 빌 때가 많았다. 그러면 윤과 제는 빈방을 차지하고 잠을 잤다. 사람들이 들고 날 때마다 빈방은 바뀌었고, 그때마다 윤과 제 역시 방을 바꿔야만 했다. 그들의 명의로 된 집이었으나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그들은 유목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별이 가득한 초원의 하늘 대신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위에 누운 그들이 보는 것은 세월에 마모된 천장뿐이었지만.
제는 준오와 미영에게 그들이 묵을 커플룸을 보여주었다. 침대 시트는 새로 빨았는데도 낡은 티가 가려지지 않았다. 헤드도 없는 침대는 그저 싸구려 철제 받침대 위에 매트리스를 얹은 것에 불과했다. 침대 아래 깔아둔 러그에는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제는 방문을 여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수치심 비슷한 것을 느꼈다. 함부로 그를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제는 동시에 방을 본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은, 어처구니없는 욕망을 느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고, 아주 찰나적인 감정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수치심이나 분노보다 더욱 강한 충동이었다. 그러나 방을 본 두 남녀는 “아, 여기가 저희 방이에요? 감사합니다. 방이 아주 넓네요”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떠한 실망의 빛도 비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활짝 웃고 있었다. 만족해하는 그들을 보면서 제는 안도감을 느꼈어야 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안도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보다 조금 더 큰 수치감과 분노를 느꼈다. 제는 “내일부터 해면이 상승할 거야”라고 말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준오와 미영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철없는 아이들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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