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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31 09:59 수정 : 2014.08.19 10:06

백수린 소설 <4화>



“이걸 신고 다녀야 할 거야.”

다음 날, 제는 준오와 미영 앞에 고무로 된 검정 장화 두 켤레를 내려놓았다. 몇 해 전 배낭여행을 왔던 커플이 사서 신은 뒤 버려두고 간 것이었다.

“온 도시에 물이 찼어.”

제가 말했지만 준오와 미영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윤이 만든 제육볶음과 시금칫국을 아침 식사로 먹었다. 다채롭게 구할 수 없는 한국 조미료의 맛을 모두 설탕으로 무마하려는 것처럼 윤의 음식은 갈수록 지나치게 달았다. 준오와 미영은 밥을 한 그릇씩 해치우고,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제는 그들이 나가기 전에 시내 지도를 주면서 오징어 튀김이나 파스타 따위의 것들을 먹을 수 있는 주변 식당 몇 군데를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그곳은 민박집에 오는 손님들을 그리로 보내는 대신 커미션을 받기로 되어 있던 식당들이었다. 숙박을 예약한 다른 손님들은 여전히 없었다. 장화를 신고, 현관 쪽으로 내려가던 준오와 미영이 탄성을 내질렀다.

“와, 선배님 대단해요!”

운하의 물이 범람해 건물 입구가 온통 물에 잠겨 있었다. 제는 슬리퍼를 신은 채 물살을 헤치고 그들 앞으로 걸어가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더 많은 물이 출렁이며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준오와 미영이 또다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베니스는 만(灣) 안쪽 석호 위에 흩어진 119개의 섬들이 400여 개의 다리로 이어진 도시였다. 그중 시가지는 아주 오래전 석호의 사주였던 곳에 세워졌는데, 그 탓에 지반이 약하고 쉽게 물에 잠겼다. 해수면 상승으로 바닷물에 잠긴 도시에는 더 이상 땅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건물들은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미처 제대로 묶어놓지 못한 곤돌라들이 어제까지 거리였던 골목을 둥둥 떠다녔다. 관광객들은 장화를 신은 채 물살을 헤치며 거리를 걸었다. 장화를 준비하지 못한 관광객들은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바지를 다 적시며 걷고 있었다. 준오와 미영이 재난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건물 밖으로 나서자 제는 있는 힘을 다해 건물의 대문을 닫았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어둠 속에 고여 서서히 부패해갔다.

제는 다리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윤은 식탁 의자에 티셔츠와 팬티만 입고 앉아 준오와 미영이 남긴 음식들을 한데 비벼 먹고 있었다. 거대한 허벅지와 흉측하게 늘어난 뱃살 탓에 윤의 보라색 팬티는 비현실적으로 작아 보였다. 윤이 원래부터 저렇게 뚱뚱하지는 않았다. 일본인형같이 오밀조밀한 얼굴에 각선미가 빼어난 윤에게 반했던 일이 과연 실제로 존재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윤은 허겁지겁 음식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입 주변과 손가락은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음식들을 먹어치우는 윤은 한 마리의 돼지처럼 보였다. 늙고 더러운 지방 덩어리의 몸. 제는 윤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미영의 존재 때문일까. 윤에 대한 혐오가 모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학부 졸업 직후 처음 만났던 윤은 미영처럼 예뻤겠지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무렵 제는 몇몇 동기들과 단체전에 참여했고 크지는 않았지만 개인전도 열었다. 제의 개인전은 이런저런 신문의 문화면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 어떤 유명 미술잡지에서는 주목해야 하는 스타 미술가로 그를 인터뷰했다. 굴지의 정유회사 CEO가 세운 미술관의 기획전시에 젊은 작가로는 유일하게 작품제작 주문을 받기도 했다. 모든 것은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순탄한 자신의 삶이 두려울 때도 있었고, 그의 작품에 대해 호의를 가졌던 평단이 어느 순간 등을 돌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는 거듭되는 성공과 주변의 찬사에 익숙해졌다. 제는 사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크게 실패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순간에 자신의 능력을 믿는 편이었다. 신입생 시절에는 많은 지방 출신의 학생들이 그러듯 수도권 출신의 중산층 아이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자신감과 세련됨에 약간의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 결핍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는 재능만이 자신을 성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고,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렸다. 잘나갔기 때문에 제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동시에 그는 오만하다는 평을 종종 들었는데, 제로서는 자신이 왜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해수면 상승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체에 울렸다. 비까지 내려 도시는 점점 더 깊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배수시설이 좋지 않은 터라 빗물은 빠져나가지 못한 채 그대로 골목에 갇혔다. 그 탓에 일찍 숙소로 돌아온 준오와 미영은 젖은 양말과 바지를 벗어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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