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 <5화>
평상시처럼 제가 인터넷으로 한국의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킬킬대고 있는데 준오와 미영이 거실로 나왔다. 러닝셔츠 차림인 것이 신경 쓰여 제는 벗어두었던 윗옷을 찾아 걸쳤다. 미영과 준오는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멋대로 집 안 곳곳을 구경했다. 핫팬츠를 입은 미영의 다리가 자꾸 신경 쓰이고,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대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거슬려 제는 볼륨을 높였다.
“선배님, 이거 뜻이 뭐예요?”
준오가 부엌과 거실을 잇는 복도의 벽에 칼로 새겨진 글씨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소멸하고 있는 중이다’란 뜻이야.”
제는 귀찮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거실의 초록색 벽지는 선배님이 바르신 거예요?”
얼마 안 가 미영도 큰 소리로 질문했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었어.”
제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눈치채지도 못했는지 그들은 문 색이 벽지와 잘 어울린다는 둥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제는 볼륨을 최대치로 올렸다. 윤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닭고기의 힘줄을 커다란 식칼로 내리쳤다.
“참, 이거 같이 먹으려고 사왔어요!” 방으로 들어간 미영이 포도주를 한 병 들고 다시 나왔다. 그들은 치즈와 감자칩, 포도주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준오와 미영은 윤과 제가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듯 눈을 빛냈다. 제는 하는 수 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이토록 저돌적으로, 순진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제는 준오와 미영을 볼 때 느껴지는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 감정은 설명될 수도, 명명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준오와 미영은 식탁 주변에 둘러앉아 그들이 보았던 궁전이나 다리 같은 것들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스스로 예쁘다는 것을 아는 여자애 특유의 애교 섞인 표정을 지으며 미영은 레스토랑에서 오징어 튀김을 먹었는데 떡볶이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준오는 벌써 몇 번째, 학교에서 제에 관한 신화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준오의 말에 윤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뒤틀렸고 제는 기분이 상했다. 준오가 자신의 그림들을 보여달라거나 작업실을 구경시켜달라고 하지는 않을까 제는 걱정스러웠다. 작업실이었으나 이제는 4인용 도미토리일 뿐인 그 방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젤과 물감은 모두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준오를 만나기 전날 밤, 제는 창고에 처박아둔, 망친 그림들이라도 꺼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했다. 제는 태연한 척 포도주를 들이켜고 싸구려 치즈를 집어 먹으면서 더 이상 자신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는 것을 준오가 이미 알아채지는 않았을까 초조했다.
준오는 포도주를 마시며, 그림을 그려 명성을 쌓고 돈을 많이 번 뒤 세계 일주를 하면서 자유로운 예술가로 사는 것이 꿈이라고 고백했다. “선배님처럼 사는 게 너무 멋져요.” 제는 준오가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해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가, 이내 그것이 준오의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기분이 상했다. 가스레인지 위 커다란 주전자 안에서는 보리차가 끓고 있었다. 푸른 가스 불이 주전자를 집어삼킬 듯 넘실댔다. 주전자 뚜껑이 위태롭게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세계 여행을 하는 낭만적 예술가의 삶을 꿈꾸는 준오를 미영은 존경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미영이 준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웃음을 터뜨리자 목이 깊게 파인 티셔츠의 한쪽 소매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준오는 그런 미영이 귀여운지 따라 웃으며 그녀의 소매를 올려주었다. 잠깐 살을 드러낸 미영의 어깨는 동그스름했다. 티셔츠 아래 솟은 가슴은 탄력적이게 보였다.
“초록색 벽지 말야. 너희 초록색 벽지 때문에 나폴레옹이 죽었다는 사실 아니?”
윤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뜬금없이 말했다.
“아뇨, 처음 들어요. 왜 죽었어요?”
미영이 윤을 따라 일어서며 콧소리 섞인 말투로 물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선 윤의 처진 엉덩이 옆, 미영의 엉덩이는 작고 봉긋했다.
“참, 선배님, 그림 좀 구경시켜주세요.”
귀청을 찢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주전자 위에 사마귀처럼 맺힌 수포들이 안간힘을 쓰고 매달려 있다가 허망하게 줄지어 떨어져 내렸다. 푸른 불꽃이 닿은 주전자의 아랫부분이 화상을 입은 듯 검게 그을려 있었다.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으로 사이렌이 또다시 울렸다. 윤이 갓 끓인 보리차를 투명한 컵에 따랐다. 보리차는 불빛에 황금색으로 빛났는데 어딘지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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