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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4 09:59 수정 : 2014.08.19 10:06

백수린 소설 <높은 물때> ⓒ이현경



백수린 소설 <6화>



줄기차게 떨어지는 빗줄기에도 준오와 미영은 열심히 베니스의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관광객들이 번번이 길을 잃는 미로 같은 골목에서 그들 또한 어김없이 길을 잃었고, 화려한 가면과 색색의 젤라토,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의 피자 따위를 파는 가게들을 기웃거렸다. 나흘째 되던 날, 준오와 미영은 무라노 섬으로 향했다. 유리 공예품으로 유명한 섬에서 미영은 목걸이를 하나 장만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을 항구까지 안내해주고 제는 집에 가기 위해 도시를 가로질렀다. 그칠 듯 그치지 않는 비 탓에 도시는 온통 흐렸다. 원색의 건물들은 해마다 반복되는 침수로 색이 바랬다. 간이로 만든 널빤지 다리를 딛고 한 줄로 걷는 관광객들의 우산이 부딪쳐 물방울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쏟아져 내렸다. 돌풍이 불어 우산이 자주 뒤집혔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해 도시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깊이 침수된다고 했다.

제는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는 베니스라는 도시 전체가 바닷속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전설의 대륙처럼 가라앉아버릴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널어놓은 하얀 시트가 비에 젖은 채 펄럭였다. 서로 마주 보는 오렌지색과 파란색 건물 사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트 위로 사방이 물에 젖어 착륙하지 못하는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힘겹게 날아갔다. 제는 리알토 다리 위에 올라가 장화를 벗었다. 장화에서 더러운 물이 쏟아졌다. 육지를 덮어버린 바다 위로 죽은 물고기인 양 페트병이 떠내려갔다. 정박해 있는 곤돌라가 늙은 노새처럼 비에 젖어갔다.

오래전 제는 아름다움에 있어서 타협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단호했다. 마치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자신만 아는 듯, 그는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오히려 사명으로 여겼다. 제는 허리춤까지 오는 물살을 두 손으로 헤쳤다. 그러고 보면 윤의 부모로부터 받은 은행 대출금을 들고 베니스로 돌아와 민박을 시작한 지도 벌써 8년째였다. 그 당시 제는 재기하고 말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패한 채로 귀국할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 한국 방문 이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제의 부모는 제가 상을 받거나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릴 때마다 동네에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후배나 동기들은 모두 제의 성공담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불법민박을 시작한 것은 가능한 한 이곳에 오래 남아 돌파구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숙박업을 시작하고 몇 해가 흘렀을 때, 윤은 제에게 말했다. 이제라도 그냥 돌아가자. 아기도 갖고 싶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나 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거의 다 왔어. 그렇지만 그들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전시기획자는 제의 그림을 보며, 너는 그냥 욕심에 눈이 멀어 영혼도 없이 유행만 좇을 뿐이야, 라고 비난했다. 윤은 어느 날, 여기는 베니스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야, 라고 소리 질렀다. 윤의 기세에 제의 이젤이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러면 여기는 어디지? 제는 묻고 싶었다. 그곳이 어딘지는 제 역시 알 수 없었다.

밤사이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예년과는 어딘지 다른 비였다. 일기예보에서는 폭우라는 표현을 썼다. 이 도시의 기후 묘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단어 사용이었다. 이 역시 지구 온난화 탓이라고 했다. 빗줄기가 요란한 소리로 떨어져 내렸다. 빗소리에 제는 놀라 잠에서 깼다. 꿈속에서 집이 물살에 쓸려 어딘가로, 어딘가로 떠내려갔다. “창이 어디 열렸나 봐, 가서 좀 닫아.” 제는 침대 옆의 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빗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컸다. 제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깬 채 배를 긁으며 걷던 제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고 흠칫 놀랐다. 어둠 속에 무엇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윤의 뒷모습이었다. 비대하고 둥그런 뒷모습. 윤은 암흑 속에서 준오와 미영이 묵는 방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13세기에 지어진 집답게 방문의 열쇠 구멍은 오늘날과 달리 그냥 뚫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안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윤은 열쇠 구멍을 통해 방 안을 훔쳐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집중해서 보는지 제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대체 뭘 보는 걸까. 제는 윤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벽에 귀를 바싹 붙였다. 처음에는 빗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벽의 건너편으로부터 어떤 소리가 감지된 것은 제가 포기하고 벽에서 귀를 떼려 할 때였다. 아주 희미한 신음소리였다. 제는 얼른 다시 귀를 벽에다 가져다 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커플룸에서 준오와 미영이 몸을 섞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은 것 같은데도 점점 가팔라지는 미영과 준오의 신음소리가 낡고 서늘한 벽을 타고 들려왔다. 윤은 열쇠 구멍에 눈을 댄 채 무릎을 꿇고, 제는 벽에 귀를 갖다 댄 채 서서 그들이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을 상상했다. 제는 윤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은 지 정말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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