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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5 10:10 수정 : 2014.08.19 10:06

백수린 소설 <7화>



사방이 조용해지고, 이번에는 자리에서 일어서던 윤이 제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너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았던 탓에 다리에 힘이 없어 잠시 휘청했으나 윤은 이내 벽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제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지만 윤은 뭔가를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심심해서.” 가스레인지 위 주전자에서는 늘 그렇듯 보리차가 끓고 있었다. 언젠가도 윤은 그렇게 말했다. 너무 심심해서. 그때 무료한 얼굴로 윤은 내가 보리차에 비소를 넣는 거 몰랐지? 하고 물었다. 제가 그림을 포기하고, 미래에 대해서 어떤 희망도 기대도 더 이상 갖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결코 사람을 해칠 일 없을 정도의 양이니 걱정 말라며 윤은 제의 앞에서 보리차를 마셨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건데? 제가 심드렁한 말투로 물었다. 곰팡이가 핀 딱딱한 치즈 위, 침식의 흔적처럼 희끗한 줄무늬. 포도주 잔 벽을 타고 끈끈한 액체가 얼룩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파리 한 마리가 유리잔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앉아 있다가 미지근한 포도주 속으로 고꾸라졌다. 검붉은 액체 속에 빠진 파리가 다리를 떨며 허우적거렸다. 윤은 비소에 중독된 투숙객 중 누군가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면 지루함이 조금은 견뎌진다고 했다. 지랄하네. 비소가 어디서 났는데? 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신, 나폴레옹이 왜 죽었는지 알아? 윤의 눈은 거실의 초록색 벽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소중독이야. 나폴레옹 방이 초록색 물감 들인 벽지로 꾸며져 있었거든. 윤의 표정이 어딘지 기괴해, 제는 애써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하네. 윤은 심드렁한 얼굴로 둔탁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실컷 드시든지. 살을 찌우는 것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듯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던 윤의 육체. 윤은 투숙객이 올 때면 늘 보리차를 끓였다. 그렇지만 지금껏 이 민박집에 묵었던 투숙객 중 누구도 죽어나간 사람은 없었다. 지루한 매일매일이 지루하고 또 지루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제가 침실로 돌아가 겨우 다시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윤이었다.

“무슨 일이야?”

제는 잠에서 덜 깬 채 윤을 향해 물었다. 윤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었나 봐.”

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소리야?”

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죽은 것 같다고.”

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허둥대며 방을 나서는 윤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불길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제가 벌떡 일어서자 낡은 매트리스의 용수철이 비명을 질렀다. 부엌 입구에는 귀엽고 작은 미영이 눈을 감은 채 윤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제는 조금 전까지 벽 너머 들려오던 생생한 욕망의 신음소리를 기억했다. 제가 벽에 귀를 대었을 때, 미영이 준오와 뒤엉켜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지금 미영은 힘없이 윤의 두 팔에 안겨 있었다. 미영의 얼굴은 창백했고 팔은 무기력하게 늘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놀라서 물었다.

“비소 탓인가 봐.”

윤이 목소리를 낮추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식탁 위에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컵이 쓰러져 있었다. 갑자기 윤이 나른한 목소리로 내뱉었던 말이 제의 머릿속을 스쳤다. 보리차에 물감을 타왔다던 윤의 말이 정말 사실인가. 물감 따위로 정말 비소중독이 될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미영은 지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죽은 것 같아. 어떻게 해?”

윤이 조금 더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 신경질적인 윤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제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야. 제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앰뷸런스를 불러야 할까? 근데 그럼 나 감옥 가는 거야?”

멍하니 서 있는 제에게 윤이 채근하듯 질문을 퍼부었다.

“우리, 살인범이 되는 거냐고!”

살인범이라는 윤의 말에 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정말 죽은 것이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누군가 이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 누군가를 이곳에서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의 삶은 정말 끝장이었다. 죽은 게 아니라, 잠깐 기절한 것일 수도 있어. 제는 미량을 넣을 뿐이라던 윤의 말을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죽은 게 확실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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