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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7 10:07 수정 : 2014.08.19 10:07

백수린 소설 <9화>



“준오를 어떻게 하지?”

제가 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미영의 발을 묶기 위한 끈과 구형 텔레비전을 힘겹게 안고 뒤따라오던 윤이 불안한 얼굴로 제를 올려다보았다. 제와 윤이, 무엇이 되었든 둘 모두를 위해 같이 고민을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윤의 얼굴에서 제는 그의 그림에 숨겨진 아름다움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몇십 분 동안 작품 앞에 서 있던 스물여섯 살짜리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반듯한 이마에서 코로, 턱으로 이어지던 윤의 옆얼굴에는 1960년대 미국 영화 속 고전 미인의 선이 있었다.

“내가, 내가 생각해볼게.”

제는 지금이라도 당장 윤을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는 윤에게 성욕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느끼는 충동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제는 어쩌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러자 어이없게도 기뻤다. 시체가 경직되어감에 따라 점점 더 무겁게 그를 짓눌렀으나 상관없었다.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고, 윤은 살을 뺄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심장이 점점 더 세차게 뛰었다. 이것이 기쁨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제는 틀림없이 그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제는 미영을 업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의 나무문은 바깥의 물 때문에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제와 윤이 힘을 합쳐 가까스로 육중한 문을 열자 짜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물이 거침없이 건물 안으로 범람해 들어왔다. 도시는 대홍수가 난 것처럼 잠겨 있었다. 제는 계단에 내려놓았던 미영의 시체를 다시 둘러업었다. 미영의 몸은 아까보다 더 무거웠다. 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와 윤은 자전거나 살이 부러진 우산과 함께 집 앞으로 떠내려오는 곤돌라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들은 미영을 태우고 텔레비전을 실었다. 배가 너무 작아 윤은 탈 수 없었다. 제는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사위가 여전히 망각처럼 어두웠으나 곧 해가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는 마음이 급했다. 어둠에 잠긴 더러운 물이 첨벙, 첨벙 소리를 냈다. 제는 계속 노를 저었다. 가능한 한 멀리, 바다로 가야만 했다. 낡은 건물들이 바닷물에 부식하는 소리가 서걱, 서걱, 서걱, 제의 귓가에 울렸다. 오래된 건물들이 기형적으로 몸을 비튼 채 수런거렸다. 건물 외벽에 박힌 저주받은 혼령의 눈[眼]이 제의 움직임을 감시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는 그의 삶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생각했다. 언젠가 그에게도 삶이 우호적이던 때가 있었다. 꿈을 꾸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달콤한 날들도 분명 존재했다. 모든 것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지만 동시에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제는 아무 건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이상 노를 저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배를 멈추었다. 물안개가 낀 사위는 카본 블랙을 덧칠한 듯 검었다. 제의 머리 위로, 실금처럼 가늘게 그려진 그믐달만이 내플스 옐로 빛깔로 어둠 속에서 번득일 뿐이었다. 그 주변으로 달무리가 오레올린 색 물감을 스펀지로 뭉개놓은 듯 희미하게 어둠을 물들였다. 무엇도 눈에 띄지 않아, 제는 그곳이 섬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일 거라고 믿었다. 제는 장갑을 끼고 가져온 끈으로 미영의 발을 묶었다. 발아래에는 집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물건이었던 구형 텔레비전을 달았다. 10년 전, 윤과 제가 처음 베니스에 도착해 원룸에 살던 시절 장만했던 것이었다. 텔레비전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제와 달리 윤은 모름지기 집에는 가장 크고 좋은 텔레비전이 중앙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에 신혼집을 장만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좁은 원룸 바닥을 광이 나도록 쓸고 닦던 윤의 두 뺨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끈을 묶는 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계속 빠르게 뛰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희미한 달빛에, 검은 물결이 흩뿌려놓은 티타늄 조각처럼 반짝였다. 제는 미영을 바다에 밀어 넣었다. 너무 무거워, 그 바람에 곤돌라가 뒤집힐 듯 휘청거렸다. 제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곤돌라 바닥에 엎드렸다. 다 끝났다. 제는 이제껏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제는 자신이 얇은 면 티셔츠에 사각팬티 차림이라는 것을, 11월의 음습한 밤공기는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는 배의 바닥에 몸을 눕혔다. 제가 눕자 작은 배가 꽉 찼다. 부패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물의 한복판에 누워 제는 그의 뜨거운 심장을 느꼈다. 관처럼 컴컴한 하늘 아래서 그는 아주 오랜만에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그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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