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 <10화>
제에게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준오였다. 선배님께, 라고 시작하는 메일에는 한국에 잘 도착했다고 쓰여 있었다. 메일을 다 읽은 제는 장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준오는 베니스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고, 여행하는 동안 힘들고 괴로웠던 적도 많았지만 배운 것이 더 많았노라고 썼다. 그는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지만 여행을 통해 얻은 긍정의 힘으로 조금 더 용기를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을 하겠다고도 썼다. 그리고 메일의 말미에는 미영이도 안부를 전해달래요, 라고 덧붙였다. “또 어딜 나가?” 윤이 제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팬티 차림으로 거실을 어슬렁거리는 윤의 허벅지가 걸을 때마다 출렁였다. 더럽고 어두침침한 계단을 내려가 가까스로 육중한 문을 열자 짜고 썩은 내 진동하는 물이 거침없이 건물 안으로 범람해 들어왔다. 제는 천천히 물살을 헤치며 걸어나갔다. 주인을 잃은 곤돌라 하나가 어디선가 쓰레기와 함께 떠내려왔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얼룩덜룩해 보이는 곤돌라였다. 그날 만약. 각 건물의 배수관에서 물이 수도꼭지를 최대로 튼 양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날 만약 미영이 죽은 것이 현실이었더라면. 제는 가끔 생각했다. 제는 서서히 산마르코 광장 앞을 걸었다.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그려졌다는 대성당의 벽화를 보고자 했던 관광객들은 침수 탓에 성당 문이 폐쇄되어 허탕을 치고 돌아섰다. 성당의 직원들은 효용 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바닷물을 밖으로 퍼서 버렸다. 천천히 바닷물에 침식하고 있는 것은 대성당 벽면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제는 성당 쪽으로 헤엄치듯 걸어갔다. 가슴팍까지 차오른 물을 타고 죽은 쥐가 떠내려왔다. 제는 물속에서 한 발씩 걸어나갔다. 화려했던 성당의 금박 장식이 오랜 세월에 씻겨 벗겨지고, 먼 옛날 등대로 쓰였던 붉은 종탑의 밑은 바닷물에 삭아갔다. 은빛 가면을 쓴 무희들이 있던 자리는 모두 물에 잠겼다.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했던 광장 위로 노천카페의 노랗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영원할 듯 빛나던 순간은 사라지고 모두가 종국에는 늙고 병들다 종료되는 것이 삶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사람들은 피로한 얼굴로 집에 차오른 물을 묵묵히 양동이 가득 퍼서 창밖에 버렸다. 윤은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거고, 제 역시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제는 피부로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생(生)은 수없이 많은 모멸감과 열패감을 선사할 것이지만 그 와중에 아주 가끔 또 영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할 것이고 또 아주 가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할 것이다”라던 문장을 떠올렸는데, 그것은 제가 졸업전시회 팸플릿의 머리말로 썼던 문장이었다. 단기간에 큰돈을 번 중국인 관광객들이 곤돌라 위에 앉아 비를 맞으며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서부식 악센트가 강한 미국의 고등학생들이 더러운 물속을 헤엄치다가 중국인들의 카메라를 향해 손짓했다. 제는 물기로 얼룩져가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 채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물에 젖어 흡사 쥐처럼 보이는 비둘기 한 마리가 타는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처박은 채 허겁지겁 소금물을 마시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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