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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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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5화>
“잠깐 들어와서 차나 한잔 하고 가.”
영감님 댁은 굉장히 낡은 5층짜리 건물에 있었다. 연립주택이 아닌 건 확실했다. 옛날 옛적 상가로 사용되던 건물 같았다. 포목이나 철물을 사고팔던 사람들이 유령처럼 건물 안을 떠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 그림자도 없다.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진 시멘트 벽이 세계전도를 좌악 펼쳐놓은 것처럼 웅장해 보인다.
“뭐 해? 어려워 말고 올라와.”
암벽등반 코스 같은 계단을 영감님 혼자서 척척 잘도 올라간다.
“제가 출근을 해야 해서요.”
차는 마시고 싶다. 따뜻하게 한잔 하면 기운도 날 것 같다. 하지만 계단이 너무 아찔해 보인다. 잡고 올라갈 난간 같은 것도 없는 그냥 암벽등반 코스다. 로프가 없으면 올라갈 자신이 없다. 아쉽지만 차나 한잔 하고 가는 건 다음 기회에.
“어차피 지금 나가도 출근은 못 해. 차나 한잔 하면서 바람이 멈추면 그때 가.”
등 뒤에서 휘이잉, 이런 무서운 소리가 들린다.
“그럼 그럴까요?”
“그렇게 해.”
암자를 찾아가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는 기분이다. 앞장서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영감님이 소림사쯤 되는 고찰의 큰스님처럼 보인다.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니야. 처음이니까 내 손 잡아.”
2층까지 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3층부터는 영감님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운동 좀 해. 남자는 근력이야.”
5층 계단 끝에서 우뚝 선 유리문 하나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호연지기’ 문 같다. 하지만 문에 붙어 있는 네 글자는 ‘공중부양’이다. 헬스장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체육관인가? 도 같은 걸 닦는 수련원 같기도 하다. 아무튼 사기꾼 냄새가 풀풀 난다.
“여기야. 들어와.”
막상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훨씬 넓다. 천장에는 샌드백도 매달려 있다. 낡은 바바리코트 속에서 어깨를 늘어트린 채 혼자만의 고독을 씹고 있는 중년 아저씨의 뒷모습처럼 쓸쓸해 보인다. 몇 군데 찢어지기는 했지만 부상방지를 위한 녹색 매트도 확실하게 깔려 있다.
그 매트 위를 가로지르면 반대편 벽에 쪽문이 하나 달려 있다. 영감님을 따라 들어가보니 거기가 내실이다. 제법 살림집 분위기가 난다. 싱크대 옆에 가스레인지가 붙어 있고, 오래된 전기밥통도 보인다. 보온램프에 불이 들어와 있다. 안에 밥이 있다는 증거다. 간이침대도 보인다. 하사관들이 쪽잠을 잘 때 쓰는 군용침대다. 이런저런 살림살이들도 눈에 띈다. 라디오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들도 있고,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양말과 내의도 보인다. 질식할 정도로 생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바닥에 앉아서 벽에 걸린 사진들을 둘러본다. 한두 장이 아니다. 액자까지 해서 먼지 하나 안 보이게 정성껏 닦아놓았다. 그렇게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이 서른 장쯤 된다. 배경은 산도 있고 바다도 있지만, 전부 영감님 혼자 찍은 독사진이다. 그중에는 방금 지나온 녹색 매트 위에서 찍은 사진도 몇 장 보인다. 특히 어디선가 본 듯한 바위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끈다. 저게 울산바위였나? 흔들바위였나? 수평선에 앵글을 맞춘 사진에서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가 어마어마한 오라를 발산하고 있다. 그런 배경을 병풍 삼아 영감님이 앉아 계신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백발을 늘어트린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꼭 도인 같다. 게다가 도복 같은 걸 입고 있다. 실밥이 터지고, 누렇게 때가 타고, 여기저기 찢어진 곳도 보이지만, 그게 오히려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저런 도복을 걸치고 있으면 부동산 사장님도 도인처럼 보일 것 같다. 할! 냅다 소리를 지르면 그게 바로 사자후고, 손가락을 튕겨서 코딱지를 날리면 그게 바로 단지신공이다. 그런 느낌이다. 갑자기 사진 속의 영감님이 정통 무협소설에 나오는 큰 사부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식기 전에 마셔.”
맞은편에 앉은 영감님이 스마일, 웃으며 차를 권한다. 홀짝, 한 모금 마신다. 뜨거운 물에 티백을 우려낸 둥굴레 차다. 구수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영감님 머리 위에도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달력사진 같은 배경,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신 영감님, 단벌 도복인지 걸레처럼 너덜너덜한 걸 그대로 걸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진들과는 뭔가 다르다. 물론 크기가 제일 크다. 가로세로 1미터쯤 되는 대형 사진이다. 액자도 무궁화 장식이 들어간 고급 액자다. 하지만 이 사진이 특별한 건 크기나 액자 때문이 아니다. 사진 속의 영감님 때문이다. 지상에서 어른 키 높이쯤 되는 공중에 떠 있다. 아무리 봐도 합성 같지 않다. 조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아까는 큰 사부님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앞에 앉아 계신 영감님이 무림의 절대고수쯤으로 둔갑한 것 같다.
“영감님, 대체 뭐 하는 분이세요?”
이렇게 물어도 대답이 없다. 대신 놀라서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스마일, 웃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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