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8화>
이런 경험은 전에도 많이 해봤다.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누가 말을 건다. 외국인 같지는 않은데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다. 당연히 못 알아듣는다. 영어 못 하세요? 갑자기 한국말을 한다. 대한민국에서 영어를 못 하는 건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거란다.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비유다. 내 손에는 어느새 민병철 영어 테이프 세트가 들려 있다. 또 한 번은 공원에 앉아 있는데 누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자기가 관상을 좀 볼 줄 안단다. 천운을 타고나셨네요. 크게 되시겠어요. 기분이 좋아진다. 제왕의 상이란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조상님 중에 한 분이 앞길을 막고 계세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비키지 않는다. 몇백만 원 때문에 제왕의 자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피가 끓는다. 그럴 수 없다. 며칠 후, 이 몸은 제사상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 삼십몇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으련다, 다짐해본다.
“물건 강매는 안 해. 회비도 없고.”
정말이요? 귀가 솔깃했다. 일단 어떤 모임인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톱니바퀴가 오천만 개나 되는데 그중에 불량품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잖아. 혼자서만 헛돌기도 하고, 망가져서 버려지기도 하고, 다른 톱니바퀴들과 이가 안 맞기도 해. 그렇게 돈 없고, 능력 없고, 몸무게까지 없는 톱니바퀴들이 몇 있어. 그런 불량품 톱니바퀴들의 모임이야.”
결국 이 사회에서 소외된 낙오자들의 총집합이다. 그 모임에서 지금 신입회원을 모집 중이란다. 같이 있으면 의지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등록해.
“됐습니다.”
낙오자들의 어깨를 빌릴 만큼 만신창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낙오자 모임에 가입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 차는 잘 마셨다. 앉아서 쉰 덕분에 기운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있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그만 가봐야겠네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가면 바로 날아가.”
우웅, 미친 사람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밖에서 부는 바람이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앉아봐.”
영감님의 얼굴을 외면하며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치료의 첫걸음이 뭔지 알아?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야. 물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치료도 할 수 없어.”
말이 달라졌다. 아까는 병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아무리 도망쳐도 붕은 붕인 거야. 외면하지만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해.”
예? 뭘 인정해요?
“붕!”
설마 붕 뜬다고 할 때 그 붕?
“우리끼리는 그렇게 부르고 있어. 잡을 게 없으면 붕, 뭔가 들고 있지 않으면 붕, 그러니까 이름도 붕. 멤버는 나까지 총 네 명이야.”
그럼 영감님 말고도 세 명이나 더 있어요?
“너까지 합하면 총 다섯 명.”
잠깐, 아니 지금 어디다가 뭘 막 합하고 그러십니까?
“그런 사람들이 없어. 다들 진국이야. 너도 만나면 좋아할 거야.”
그건 만나봐야 아는 거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몰라?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아무튼 한번 와.”
꼭 올 거지? 헤어지기 전에 영감님이 물었다.
“올 수 있으면 올게요.”
“기다릴 테니까, 꼭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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