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9화>
여기는 다시 사무실 건물. 계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커피는 아까 다 마셨다. 종이컵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행이다. 사무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책상에 앉아 볼펜을 만지작거린다. 돌돌, 멍석을 말고 누워 몽둥이가 날아오길 기다리는 기분이다. 12시 50분.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볼펜을 분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감님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나까지 가면 몸무게 제로의 붕들이 자그마치 다섯 명이나 된다. 영감님 말처럼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겼는지, 뭐 하는 사람들인지도 궁금하다. 그래서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반. 하지만 어차피 낙오자들의 총출동이다. 괜히 갔다가 한숨만 늘고 마음만 어두워질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사는 게 힘들다. 여기서 더 힘들어지면 내가 갈 곳은 한강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모임에 갈까 보냐, 머리에 띠를 두른 채 온몸으로 막아서는 마음이 반.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본다. 한 움큼, 소중한 머리카락이 스무 가닥 이상 빠져버렸다. 불길한 징조다. 기다릴 테니까, 꼭 와. 기다리지 마세요, 영감님.
“점심은 뭐로 했어?”
누군가 했더니 마 대리다. 부담 없는 입사 동기라 우선 안심이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 예전에는 술만 마시면 꼭 이런 소리를 해대던 인간이다. 결혼해도 너는 애 낳지 마라, 요즘은 이런 소리를 한다. 분유 값에, 기저귀 값에, 때맞춰서 예방접종 해야지, 이불도 아기 이불은 한 장에 몇십만 원씩 한다. 옷값도 만만치 않다. 천 조각 몇 개 붙여놓고 몇십만 원이다. 어린이집도 보내야지, 유치원도 보내야지, 요즘에는 학원에 안 다니면 친구도 못 사귄다. 대한민국에서 애 키우는 게 쉬운 줄 알아? 등골이 휘고 뼛골이 빠진다니까. 술이 좀 들어가면 이런 소리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 사무실에서 먹으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밖에서 먹고 들어온다. 얼마 전에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혼자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 마 대리의 쓸쓸한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적도 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아니면 짜장? 짬뽕?”
마 대리가 즐겨 먹던 점심 메뉴다. 그런 메뉴들을 아직 잊지 못했는지 목소리에도 눈빛에도 애절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애는 알까? 자기가 먹고 있는 분유가, 자기가 차고 있는 기저귀가 아빠의 점심 식대라는 사실을.
“얼른 불어. 입 냄새 맡으면 금방 답 나와.”
오늘은 입 냄새를 맡아도 답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내 입에서는 그냥 입 냄새만 난다. 편의점에 있을 때 컵라면 하나 먹고 계속 굶었다.
“공복.”
“정말이야?”
“정말이야.”
“후, 해봐.”
후, 했다. 음주측정기 대신 마 대리의 얼굴에.
“정말이네. 다섯 시간쯤 전에 컵라면을 하나 먹었지만 그 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군.”
입 냄새로 이런 걸 알아맞힌 마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게 묻는다.
“점심 안 먹고 뭐 했어? 계속 사무실에 있었던 거야?”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냐? 점심시간에 사무실 지키고 있게, 라고 대답했으면 좋겠지만, 오전 근무 펑크 내고 지금 막 출근했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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