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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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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10화>
“공복에는 커피만 한 보약이 없지. 자판기 커피 한 잔 어때? 동전 있지?”
정말 모른다. 마 대리의 자리는 내 맞은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길이 마주친다. 그런데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도련님 이리 오세요, 도련님 이리 오세요, 여우에게 홀려 산속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다.
“나는 방금 마셨어.”
마 대리에게 동전 세 개를 상납하고 볼펜을 다시 조립한다. 스프링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불구가 된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본다.
쾅 하고 문이 열린다. 엄마야, 소중한 간이 툭, 흙먼지가 뒹구는 바닥에 떨어져 더럽혀질 뻔했다. 이렇게까지 무섭게 문을 학대하는 인간은 사무실의 넘버원 추 부장밖에 없다. 질겅질겅 이쑤시개를 씹으면서 들어온다. 총싸움을 좋아하는 추 부장은 홍콩 누아르의 거장 오우삼 감독의 열혈 팬이다. 이쑤시개나 성냥개비, 그런 게 없으면 나무젓가락 같은 걸 씹으면서 <영웅본색>의 주윤발 흉내를 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잡초를 씹으면서 호시탐탐 주인집 마님을 노리는 머슴처럼 보인다. 그 뒤를 이어 추 부장의 꼬리표 용 과장이 들어온다. 평소에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희한하게도 점심시간만 되면 늘 추 부장이 먹고 싶어 하는 걸 먹고 싶어 한다. 둘 다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다. 입에서 썩은 사과처럼 단내가 풍긴다. 안 봐도 비디오다. 소화 촉진을 핑계로 반주를 과음했다. 2차로 노래방까지 갔다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지막은 언제나 사무실의 홍일점 신선해 씨다. 자기관리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과도한 화장으로 늘 보는 사람들에게 부담감을 안겨주는 장본인이다. 출생의 비밀이 있다.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
사무실의 자리가 모두 꽉 찼다. 추 부장과 용 과장의 알딸딸한 얼굴을 힐끔힐끔 곁눈질한다. 신선해 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마우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 대리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뭘 하는 척 연기하는 게 마 대리의 주특기다.
집에서 쉬지 힘들게 왜 나왔느냐는 둥, 회사생활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둥,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피범벅이 될 줄 알았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 생각이었다. 핑곗거리도 생각해두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병원에 갔다 왔다고. 눈물을 흘려도 안 되면 무릎이라도 꿇으리라, 각오하고 있었다. 재떨이나 서류철 같은 게 얼굴로 날아와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른한 기운이 모락모락,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날의 오후 업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안 보이나? 유령이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출근길에 바람이 불고, 편의점에서 두 시간 넘게 죽치다 요원으로 오해받고, 정체불명의 영감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둥굴레 차를 두 잔씩이나 마신 그 모든 일이, 그럴 리 없지만, 식곤증 때문에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깜박 졸다 꾸게 된 악몽처럼 느껴졌다.
“사회라는 게 그래. 거대기계 같은 거거든. 사람들은 거기에 들어간 톱니바퀴 같은 거고.”
문득 영감님의 말이 떠올랐다. 회사도 사회의 일부분이다. 그러니까 기계다. 나까지 포함해서, 여기에도 톱니바퀴가 다섯 개나 된다. 추 부장과 용 과장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신선해 씨는 늘 혼자서도 꿋꿋하게 잘 도는 톱니바퀴다. 돌아가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돌아가는 척 바빠 보이는 톱니바퀴도 있다. 마 대리다. 그리고 다섯 번째 톱니바퀴가 바로 이 몸이다.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산더미다.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하지만 뭐지, 이 느낌은? 열심히 돌고 있는 것 같은데 왠지 혼자서만 헛도는 듯한 이 기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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