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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03 09:57 수정 : 2014.09.05 10:01

강태식 소설 <12화>



여고생을 통과시킨 다음 계단에 앉아서 숨도 돌리고 땀도 식혔다. 이번 기회를 통해 약해진 체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생활에 쫓겨 운동을 소홀히 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반성해보기도 했다. 앞으로 체력단련에 힘쓰자고 두 주먹 불끈 쥐며 다짐하게 되었다.

“당신 뭐야?”

일찍 일어나서 약수터에도 가고, 버스로 두세 정거장 거리는 운동 삼아 걸어 다니고, 시간 날 때마다 맨손체조나 스트레칭 같은 가벼운 운동을 매일 하는 것도 좋겠지, 이런 계획들을 한창 흐뭇한 마음으로 세우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가 신원을 조회하는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계단 같다. 어쩌면 이 건물 4층에 암벽등반 동호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묻잖아, 당신 뭐냐고?”

모르는 사람이 계단을 막고 앉아 있으면 당연히 화가 난다. 하지만 다짜고짜 반말은 좀 심했다. 시비를 거는 듯 공격적인 말투도 귀에 거슬린다. 이렇게 나오면 계단을 막고 앉아 있는 당사자도 울컥,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당신은 뭐야? 인상을 쓰면서 뒤를 돌아본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상대방도 인상을 쓰고 있다. 목소리 못지않게 분위기도 험악하다. 게다가 그런 험악한 분위기가 한두 명이 아니다. 하나, 둘, 셋……. 재빨리 머릿수를 센다. 아무리 못해도 네다섯 명쯤 될 것 같다. 인상을 풀고, 씨-익 호감 가는 얼굴로 웃는다. 빨간불이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네다섯 개. 계속 인상을 쓰고 있으면 차에 치여 응급실에 실려갈지도 모른다.

“당장 꺼져!”

제일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위협한다.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는 환자처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키만 컸지, 뼈에 피부만 살짝 코팅해놓은 것처럼 말랐다. 푹 꺼진 눈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삽으로 파낸 듯 쏙 들어간 볼이 희박한 근력을 보여준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어디 불편하세요?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소리를 질러도 박력이 없다. 문제는 손에 들려 있는 물 묻은 대걸레다. 대여섯 계단 위에서 이쪽을 향해 계속 털어댄다. 그때마다 구정물이 튄다. 우산도 없고, 와이퍼도 없다. 주르륵, 주르륵, 빗물 같은 구정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이, 형씨.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바로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걸레 남자의 박력 없는 목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낮고 묵직하다. 큼지막한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위화감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야쿠자나 중국 마피아 간부가 들려주는 ‘생활에 꼭 필요한 실전 공갈협박’의 고급편 같다. 평생 사채업에 종사하면서 잔뼈가 굵은 프로 수금원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일반인은 아니다. 가늘지만 길게 사는 게 내 인생의 목표다. 얼굴에 활짝, 비굴한 웃음꽃이 핀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고개를 저으며 대걸레 뒤쪽을 본다. 거기에 50대 중반쯤, 한번 보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몽타주의 아저씨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프레스에 눌린 것 같은 인상이다. 눈도 같이 눌렸는지 날카롭게 옆으로 쭉 째져 있다. 주먹만 한 코에 두툼한 입술, 어디다 내놔도 먹히는 얼굴이다. 오른쪽, 왼쪽, 정면에서 찍은 사진을 한 장씩 전봇대에 붙여놓으면 바로 현상수배 포스터다.

“내가 가?”

오지 마시래도 자꾸 그러신다. 현상수배범 아저씨가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구둣주걱이다. 저런 건 업소에서 많이 봤다. 플라스틱 소재의 제품이다. 손잡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구두를 신을 때 요긴하게 쓰인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사람을 구타할 때도 요긴하게 쓰일 것 같다. 구둣주걱으로 구타당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3D 입체 영상이다. B급 슬랩스틱코미디에서도 이런 명장면은 보기 힘들다. 풋,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그때, 구타당하는 사람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웃음이 쏙 들어가고,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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