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18화>
“회전식이야. 사용 후에 보고서 작성해와.”
회전식 바이브레이터 세 개를 받았다. 모양은 비슷비슷했다. 다른 건 길이와 크기, 재질 정도였다. 작성해야 할 보고서도 같이 받았다. 미관상 혐오감 여부, 손잡이 부분의 그립감, 작동 시 소음 발생 정도, 단계별 사용 느낌 같은 것들을 기재하게 되어 있었다. 커피라면 언제든지 타다 바칠 각오였다. 담배 심부름도 좋았다. 이사나 김장 때 불러도 상관없었다.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생각이었다. 자존심 같은 사치품은 어둡고 긴 실업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모두 버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이브레이터의 사용 후기 보고서라면 상황이 달랐다. 시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용 과장이 시킨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업무지시를 받았다. 아무리 출근 첫날이지만 이의를 달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사용하는 제품이 아니잖아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직접적인 NO 대신 제품의 특성에 대한 언급만 했다.
“요즘은 남자도 사용해.”
자위시장은 소비자층이 얇다고 했다. 여성 소비층만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용 과장의 설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판매 전략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자기 손으로 무덤을 파는 짓이라고도 덧붙였다. 획기적인 판매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과감하게 탈피한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거야.”
유통 경로를 개선할 수는 없다. 공격적인 마케팅도 불가능하다. 이미지가 혁신되면 제일 좋겠지만 자위기구를 내놓고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날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기로 했다. 소비층을 여성으로만 국한했던 과거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기로 했다. 이 나라의 반은 여성이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남성이다. 지금까지의 자위산업은 여성 소비층만을 공략해온 반 토막짜리 시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남성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많은 남성들이 음지에 숨어서 성 정체성 혼란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자위산업의 진정한 미래요, 새로운 희망이다. 그럴듯했다. 항문질환에 대해서 물어본 건 사무직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물론 새로운 업무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겠느냐며 윽박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하얗게 불사르리라, 이런 정신무장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 회사에 필요 없다고도 했다. 사용 후기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목이 달아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 백수생활 끝에 겨우 취직한 회사였다. 여기서 잘리면 한강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당한 업무지시라는 건 알고 있다.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이 몸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해야 한다. 정말 재가 될 때까지 하얗게 타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직장인이 이 나라에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다 잘리면 바로 범국민적인 실업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나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다. 몇 번 앉아보지도 못한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게 될지도 모른다. 이 나라에서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진동형 모델을 받았어.”
마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에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마 대리가 고백했다. 왠지 한숨이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았던 것 같다.
바이브레이터 세 개는 미리 가방에 넣어두었다. 보고서도 파일에 끼워 같이 챙겼다. 문득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전철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그날따라 멀고 낯설게만 느껴졌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10분쯤, 아무도 없는 주택가 골목을 걸었다. 꾀죄죄하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문득 먹고사는 게 뭘까?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했어?”
구둣주걱 아저씨가 물었다.
했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업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마 대리라는 동료도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떠올리면 힘이 났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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