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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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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22화>
“대장님, 오늘 저녁은 숯불 바비큐에 소주 한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사무실의 넘버 투 용 과장을 잊을 뻔했다. 용 과장이야말로 생존전략의 진정한 대가라 하겠다. 무림의 고수들을 보면, 이렇다. 권을 쓰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장을 쓰되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 줄기 바람이 비수가 되고, 길바닥에 버려진 나뭇가지가 장검이 된다. 용 과장이 바로 그런 무림의 고수다. 상대에 따라 인격을 바꾼다. 물기도 하고, 죽은 척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자유자재, 천의무봉이다. 허들에 걸려서 넘어지지도, 숨 가쁘게 달리며 다가오는 허들을 뛰어넘지도 않는다. 대신 허들 위에 펼쳐진 푸른 창공을 한 마리 새처럼 날아다닌다. 격이 다르다. 타의 추종 따위 허락하지 않는다.
용 과장은 또 일정 반경 내에 들어온 최고 권력자를 무조건 대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무실의 대장님은 추 부장이다. 물론 뻔히 보이는 아부성 발언이다. 다른 사람이 같은 짓을 하면 거부감을 살 수도 있다. 한번은 마 대리가 따라 했다가 일이나 똑바로 해, 줄창 욕만 먹었다. 하지만 용 과장이 하면 모든 게 달라진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툭 내뱉는다. 표정에도 말투에도 어색함이 없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솜사탕 녹듯이 귀에 착착 감기는 대장님. 추 부장을 보고 있으면 물론 무섭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인간은 용 과장일지도 모른다.
“그럴까? 나는 좋지.”
추 부장이 씩, 좋다고 웃는다. 주르륵, 맑고 투명한 군침 한 줄기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파블로프의 개가 보이는 조건 반사적인 반응이다. 용 과장도 고개를 끄떡이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이번 실험에서도 잘해주었어.
하지만 그런 용 과장에게도 약점이 없는 게 아니다. 허술한 구강구조가 용 과장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 같다. 입만 열면 다량의 침이 분사된다. 그래서 용 과장의 닉네임은 스프링클러다. 말을 하면서 착착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발사한다. 대장님들이 좋아할 리 없다. 이 친구 못쓰겠구먼. 사람 얼굴에 침이나 뱉고 말이야. 거래처 사람들에게도 불쾌감을 안겨준다. 뭐야, 당신? 왜 사람 얼굴에 침을 뱉어? 그래서 아직 과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프링클러 용 과장 역시 식인종 추 부장 못지않게 뛰어넘기 힘든 허들이다. 업무지시를 할 때나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때면, 아, 이런 회사 그만두고 파라, 나도 모르게 침에 젖어들며 이런 약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 비해 신선해 씨는, “실례할게요, 과장님.”
척, 3단 접이식 우산을 당당하게 펼쳐든다. 나에게 그런 용기와 기백이 있을 리 없다. 반면 마 대리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주의다. 얼굴에서 침이 흘러내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가끔은 씩, 바닥을 쳐다보며 웃을 때도 있다. 대단한 정신력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정신력도 없다. 스프링클러가 작동을 개시하면 이리저리 몸을 비튼다. 조금이라도 젖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렸다가 왼쪽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메모하는 척 고개를 숙일 때도 있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라는 건 안다. 알면서도 매번 파닥파닥 몸부림친다. 나도 신선해 씨처럼 접이식 3단 우산을 펼쳐들고 싶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다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생각만 그렇다. 일단 얼굴에 침이 튀면 몸이 먼저 반응해버린다. 신선해 씨와 마 대리가 스프링클러 용 과장이라는 허들을 뛰어넘어 저 멀리 달려갈 때, 이번에도 허들에 걸려 맨땅에 안면 슬라이딩하는 인간은 나 혼자뿐이다.
“신선해 씨, 커피 한잔 부탁해.”
요즘 용 과장은 신선해 씨라는 철옹성을 공략 중이다. 마 대리는 알아서 성문을 연다. 이 몸은 과속방지턱 정도다. 그냥 밟고 지나가면 된다. 함락하지 못한 성은 신선해 씨뿐이다. 자꾸 업무 외의 잡일을 시키면서 신경전을 건다. 원래 용 과장은 커피 같은 건 마시지 않는다. 두 손으로 갖다 바쳐도 책상 귀퉁이에서 차갑게 식어버린다. 흡연도 하지 않는 사람이 담배 심부름도 시킨다. 일종의 공성전이다. 백기가 걸릴 때까지 활을 쏘고 돌을 던진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마 대리가 갑자기 일을 열심히 한다. 숱도 몇 가닥 없는 정수리가 횅하니 비어 보인다. 이렇게나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건들지 말아주세요. 훌륭한 자체방어 시스템이다. 마 대리라면 지구가 멸망해도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 같다.
“신선해 씨, 커피 어떻게 됐어?”
계속되는 용 과장의 맹공. 신선해 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건너지 마시오, 빨간불이다. 대부분의 교통사고가 신호를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다. 몇 초 빨리 가려다가, 후진이 안 되는 곳으로 몇십 년 빨리 가는 수가 있다. 용 과장이 그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 같다. 신호를 무시한 채 위험천만한 무단횡단을 강행하고 있다.
“신선해 씨?”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 계속된다. 두 개의 거대한 기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접점에서 파바박, 엄청난 스파크가 튄다. 앗, 뜨거워! 이따만 한 불똥이 나한테로 날아온다. 이러다 재가 될 때까지 하얗게 타버릴지도 몰라, 어디로든 대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커피는 직접 타드세요.”
“사람이 왜 그렇게 뻣뻣해?”
“제가 좀 그래요. 뻣뻣해서 죄송하게 됐네요.”
둘 다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다. 마치 사회생활이라는 건 이렇게 하는 거다, 온몸으로 강의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덧 사후경직 연기에 몰입하고 있는 마 대리에게도 배울 게 참 많다.
아, 모두들 정말 열심히 산다.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지고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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