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23화>
붕들의 아지트는 스물네 시간 오픈되어 있다.
“언제든지 놀러 와.”
그래서 열어놨다는 게 스마일 영감님의 설명이다. 하지만 귀찮아서 그냥 방치해둔 느낌이다. 문을 잠그지 않으니까 좀도둑이 든 적도 몇 번 있다고 한다.
“당황하더라고.”
“왜요?”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맞는 말이다. 너무 아무것도 없다. 바닥에 깔려 있는 녹색 매트리스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너덜너덜한 샌드백이 전부다. 아무리 좀도둑이지만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까 보냐. 벽에 문이 나 있다. 내실로 사용하는 공간 같다. 조심조심 문을 연다. 살림살이들이 보인다. 가스레인지가 있고, 밥통이 있고, 냉장고도 있다. 상태를 살핀다. 가스레인지는 20년 전 제품이다. 생산업체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밥통을 보고 깜짝 놀란다. 취사는 안 되고 보온만 되는 초창기 모델이다. 보온밥통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한순간 그리움에 젖어보기도 한다. 냉장고에 기대를 걸어본다. 소음이 없다. 최신형 같다. 냉동칸 문을 연다.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냉장칸도 열어본다. 마찬가지다. 불도 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알게 된다. 이건 냉장고가 아니라, 그냥 냉장고 모양의 찬장이라는 걸.
“미안해. 가져갈 게 없어.”
사람이 있었다. 좀도둑은 깜짝 놀란다.
“힘들지? 좀 쉬었다 가.”
친절한 목소리에 좀도둑은 또 한 번 놀란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이 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늘 불친절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쫓아오거나 비명을 지르며 경찰에 신고했다. 힘드니까 쉬었다 가라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좀도둑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한 이슬이 맺힌다.
“감사합니다, 영감님. 저를 사람으로 대해주신 분은 영감님이 처음이에요.”
좀도둑은 큰절을 올린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내실에서 나간다. 그날 밤 좀도둑은 아지트에 깔려 있는 녹색 매트리스에 혼자 앉아 밤새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아침에 가보니 좀도둑은 오간 데 없고, 녹색 매트리스 위에 고여 있는 눈물과 콧물뿐이다.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몰라.”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할 때도 영감님은 늘 스마일, 웃는 얼굴이다.
“나이가 드니까 자꾸 옛날 생각만 나는 거 있지.”
슬픈 이야기를 할 때도,
“너는 어미 애비도 없냐?”
심지어는 화를 낼 때조차 얼굴은 언제나 스마일, 웃고 있다. 성격이 낙천적인 건지, 얼굴에 풍을 맞은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스마일 영감님이다. 영감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어쩌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일지도 몰라, 밝고 건전한 생각을 하면서 따라 웃을 때도 있다. 스마일 영감님만이 가진 마력이다. 걱정할 게 뭐 있어? 웃어.
요즘은 주말마다 아지트를 찾는다. 일요일에도 밥만 간단하게 먹고 아지트로 출근한다. 물론 가서 하는 일은 없다. 그냥 마음 편하게 뒹굴면서 소중한 인생을 허비할 뿐이다. 인생을 허비하는 데도 체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금방 허기가 지고 식욕이 돈다. 그러면 얼마씩 각출해서 피자나 치킨 같은 걸 시켜 먹는다. 간단하게 라면 같은 걸 끓여서 후루룩후루룩, 둘러앉아 먹을 때도 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다음에는 더욱 힘을 내서 부지런히 뒹군다. 다 같이 인생을 허비하면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는다. 뭘 해도 재미있다. 어, 벌써 이렇게 됐나?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해가 저문다.
그래도 관찰은 꾸준히 하고 있다. 다행히 표본은 많다. 어쩌면 이 몸이 붕이 된 이유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실한 자세로 아지트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저기 구둣주걱 아저씨와 대걸레가 있다. 둘 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대걸레는 가끔 뭐라고 중얼거리다 화장실로 달려간다. 구둣주걱 아저씨는 그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튼 굉장히 정적인 인간들이다. 가만히 보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 같다. 가슴속 저 깊은 곳에 끝도 없이 광활한 자기만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이다. 너무 멋지고 아름답다. 어딜 가나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초라하고 비참한 바깥세상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둬. 그런 표정들이다. 가끔은 묻고 싶을 때도 있다. 가슴속 저 깊은 곳에 있는 자기만의 세계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하지만 그걸 알게 되면 나도 저렇게 될까 봐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식칼 아줌마는 상당히 활동적이다. 아지트에 오면 샌드백을 두드리면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식칼 아줌마를 볼 수 있다. 팡! 팡! 샌드백이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앞뒤로 흔들린다. 자세가 좋기 때문이다. 주먹을 뻗든, 발차기를 날리든 때렸다 하면 정타가 들어간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그런데도 매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맹훈련의 연속이다. 원수를 갚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는 무협지의 주인공 같다.
“원수를 갚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는 거다.”
건강 유지와 비만 개선을 위한 생활체육 같은 게 아니고요?
“너에게는 본좌의 고강한 무예가 생활체육으로 보이느냐?”
죄송합니다, 바로 사과했다. 다행히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 식칼 아줌마가 가끔 말도 없이 어디를 다녀온다. 냄새가 났다. 분명히 뭔가 있어,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다녀오세요?
“밥 차려주고 왔다.”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상을 차리는 식칼 아줌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풋,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는 주먹이 날아왔다. 한쪽 팔이 부러졌다. 한 달쯤 깁스를 하고 다녔던 것 같다.
“미안하다. 다시는 때리지 않으마.”
깁스를 하고 갔더니 식칼 아줌마가 덥석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 모습마저 멋져 보였다. 호탕한 무인의 기개가 느껴졌다. 똑같은 말을 깁스 위에 쓰며 맹세도 했다. 그 밑에 도장 같은 것도 찍었다. ‘무당’이라는 빨간 글자가 쾅 박히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신 내림 받고 작두 타는 무당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무당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식칼 아줌마는 하얀 깁스 위에 이런 글도 남겼다.
아무나 한 명만 지목해라. 그게 누구든 무당의 이름을 걸고 손봐주마.
갑자기 추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용 과장의 이름도 확실하게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 대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쌓인 감정이 많았다. 두 명 더 추가하면 안 되느냐고 식칼 아줌마에게 물으려다 관뒀다. 아직 한 명을 지목하지는 않았다. 차근차근하게 생각해본 다음에 결정할 생각이다. 그래서 그때 그 깁스는 장롱 밑 깊숙한 곳에 소중히 간직해두었다. 힘들 때마다 가끔 꺼내보면 불끈불끈 힘이 난다. 도장까지 찍혀 있는 이 깁스는 명실상부한 보물 1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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