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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29 09:48 수정 : 2014.10.28 11:17

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강태식 소설 <27화>



하지만 그런 대걸레에게도 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화려한 한때가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랬다. 대걸레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일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언제나 전국 10위 안에 들었다. 그때는 부러울 게 없었다. 고등학생으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지역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었다. 장학금도 많이 받았다. 그걸로는 사업하시는 부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정말이야?”

“아시잖아요. 저는 거짓말 못 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걸레는 국내 제일의 명문 국립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당연히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녔다. 단 한 번도 과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4년 내내 전체 수석을 독식했다. 대걸레의 졸업 학점은 4.5였다. 전무후무한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지금도 학교에 가면 제 사진이 걸려 있어요.”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이 대걸레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대걸레의 앞길에는 곧게 뻗은 탄탄대로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더랬다. 무서울 게 없었다. 이제 액셀을 끝까지 밟고 야호! 신 나게 달려가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출발하자마자 끼-익! 브레이크가 걸렸어요.”

자기가 고른 대기업에 취직하고, 연수를 마친 다음 해당 부서에 배치될 때까지는 좋았다. 부릉부릉, 엔진이 가열되면서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동이 걸린 다음부터였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이지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사람과 사람이 겹치고 부딪힌다. 성격도 다르고 개성도 다르다. 당연히 마찰이 생기고 스파크가 일어난다. 이때 필요한 윤활유가 바로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는 한마디의 거짓말이다. 이 나라의 직장인 치고 거짓말의 이런 생리와 효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때와 장소에 따라 빡빡한 기계에 기름을 치듯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물론 상대방도 거짓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다. 이 친구 요즘 아부가 늘었어, 말은 이렇게 해도 허허허, 기분 좋게 웃는다. 하지만 이걸 못 하는 인간들도 있다. 남들은 쉽게 쉽게 잘도 하는 걸, 이 인간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게 안 된다.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발바닥을 만지고 있는 이 대걸레가 바로 그 대표주자 되시겠다.

직장 상사가 묻는다.

“이 넥타이 새로 산 건데, 어때?”

브라보! 영화배우 같으십니다, 일어나서 박수까지 칠 필요는 없다. 좀 봐주다가 그냥 잘 어울린다고 한마디 해주면 된다. 저쪽은 정말 잘 어울려? 기분 좋아 좋고, 이쪽은 그 덕에 점수 따서 좋다. 흔히 말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하지만 대걸레는 그걸 못 한다.

“안 어울립니다.”

입이 열리는 순간 대량 실점이다. 상사의 얼굴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동료들의 얼굴도 하얗게 질린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다. 북극에 위치한 이글루 지사도 아닌데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쌩쌩 분다. 물론 다른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10년은 젊어 보이십니다.”

10년이 젊어지면 내가 자네보다 어려. 가만 보면 이 친구가 요즘 나하고 맞먹으려 든다니까. 상사가 허허허, 기분 좋게 웃는다. 사무실의 분위기도 덩달아 화기애애해진다.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점수가 쌓여간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면 어디선가 으르렁으르렁, 늑대가 나타난다. 부러진 갈비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오고, 따끈따끈한 내장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린다. 바로 속이 뒤집힌다. 웩, 사무실 바닥에 오물이 쏟아진다. 결국 입바른 소리를 하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든 상황이 악화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

하지만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대걸레는 말한다. 늑대가 나타난다. 부러진 갈비뼈와 따끈따끈한 내장. 그리고 웩!

회식 다음 날이다. 상사가 묻는다.

“내가 어제 술이 좀 과했지? 2차에서 필름이 끊긴 다음에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네. 혹시 실수한 건 아닌지 몰라.”

이 말을 받아 누군가 이렇게 대답한다.

“실수는요. 매너 좋으시던데요. 과장님 덕분에 어제 분위기 아주 화기애애하고 좋았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전날의 회식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난장판이었다. 뭘 봐, 씹새야. 너 이 새끼, 평소에도 마음에 안 들었어. 시비가 붙고 욕설이 난무했다. 머리에 넥타이를 동여맨 과장이 주먹과 발길질을 날리면, 코에 나무젓가락을 꽂고 있던 부하직원들이 얼굴과 온몸을 사용해서 착실하게 받아냈다. 놔봐. 새끼가 과장이면 다야? 누군가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질러댔고, 또 누군가는 인간이 싫어, 사람들이 싫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징징 짜기만 했다. 그런 회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두 웃고 있다. 입을 모아 즐거웠다고 말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건 대걸레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덜컥, 사무실 문이 열리고 으르렁으르렁, 늑대가 나타난다. 부러진 갈비뼈와 따끈따끈한 내장도 따라 들어온다. 안녕하쇼. 번쩍 손을 들며 대걸레를 아는 체한다. 하는 수 없이 대걸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차 대리님이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어제 회식에서 과장님은 미친개처럼 날뛰셨습니다. 폭언을 남발하시면서 주먹을 휘두르셨습니다. 참다못한 정 대리님이 곱게 취하라는 의미의 막말을 하자 과장님께서는 분연히 술상을 엎으시며 일어나…….”

과장의 얼굴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동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쌩, 사무실에 찬바람이 분다. 대걸레로서는 만회할 수 없는 대량 실점이다. 대신 늑대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간다. 부러진 갈비뼈와 따끈따끈한 내장도 그 뒤를 따른다. 다음에 또 봅시다.

그런 일이 반복된다. 직장 상사는 물론 같이 입사한 동료들까지 대걸레에게 등을 돌린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능력은 있는데 사회성이 없음! 이런 문구가 쾅, 대걸레의 이마에 낙인처럼 찍힌다. 이제 대걸레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곧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 대걸레 곁에 있으면 덩달아 사회성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 끼리끼리 논다는 식의 말을 듣게 될 위험성도 있다. 그래서 모두 대걸레를 피한다.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회식 자리에서도 대걸레 곁에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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