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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8 09:31 수정 : 2014.10.21 10:13

강태식 소설 <33화>



다음 날,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꿈 때문에 나는 여전히 크고 딱딱했다. 발기 최장기록을 경신해버렸다. 걸을 때마다 바지에 쓸려 아팠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켰다. 친구네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이래서 청춘은 아픈 거구나.

친구네 집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몇 번 더 눌렀다. 아무도 없나 보네, 포기하려고 했다. 바로 그 때였다.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는 친구의 이름을 댄 뒤, 만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그럼 들어와.

탈칵, 인터폰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 꿈속에서 만난 바로 그 여자였다.

엄청난 자극이 온몸을 강타했다. 여자는 보라 빛깔 핫팬츠에 영어가 들어간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자꾸만 E컵 가슴으로 눈이 쏠렸다. ‘Sexy girl’이라는 영어 단어가 가슴이 만들어놓은 굴곡 위에서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다. 핫팬츠 위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언덕도 어루만져달라는 듯 애절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계곡의 윤곽도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금 걔 없는데……. 들어와서 기다릴래? 괜찮아, 난 걔 누나야.


그 유명한 ‘친구 누나’ 시리즈였다. ‘여자교생’ 시리즈와 함께 남자 화장실 낙서문화에 굵은 획을 그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음담패설이었다. 대걸레도 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어본 기억이 났다. 아마 학교 화장실 같았다. 거기에는 삽화도 곁들여져 있었다. 거친 터치에 대상의 형태를 잡아내는 표현력도 형편없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림이 주는 자극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더 이런 글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터미널이나 전철역, 유흥업소 화장실에서 대걸레는 심심풀이로 이런 글들을 읽었다.

대개는 내용이 너무 뻔했다. 모두 아마추어 수준의 글들이었다.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제의식도 빈약했고, 표현도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문체를 따지기 이전에 오문과 오자가 너무 많았다. 직설적인 문장은 읽는 이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반복되는 묘사는 필자의 빈약한 상상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글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구성상에도 문제가 많았다. 도입부가 없었다. 모든 글은 절정에서 시작해서 결말에서 끝나는 2단계 구성이었다. 그냥 덮치고 쑤시면 그게 절정이었다. 빨거나 핥는 장면이 있으면 그나마 완성도 높은 글에 들었다. 그러다 발사하면, 이야기는 갑자기 결말을 맞이하고, 글도 거기서 끝났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글이었다. 읽고 나면 후회와 허탈감만 밀려왔다.

그에 비해 방금 읽은 글은 레벨 자체가 달랐다. 처음부터 벗겨놓고 시작해서 바로 행위에 들어가는 종전의 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복선도 깔려 있었고 디테일도 살아 있었다. 특히 꿈속에서 만난 여자가 친구네 누나로 오버랩 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뭐랄까? 과연! 하며 무릎을 치게 만드는 꽉 짜인 플롯의 힘, 꿈과 현실의 이중구조를 과감하게 넘나드는 거침없는 스케일, 아울러 《구운몽》에서 그랬듯 인생 자체를 우연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무상할 수밖에 없다고 규정짓는 듯한 작가의 고뇌 어린 세계관까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대걸레는 작가의 유려한 필력과 글에 대한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양보를 모르는 장인 정신과 타고난 재능을 보면서 감탄했다. 자칫 구태의연해지기 쉬운 이야기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픽션으로 재가공한 작가의 뚝심과 상상력에도 경의를 표했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 글은 화장실 낙서문화사에 불어닥친 일대 파란이다, 이건 혁명이요, 진화다, 대걸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글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그나마 글 하단에 다음과 같은 별도의 사항이 첨부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다음 편은 ○○빌딩 5층 남자 화장실 끝에서 두 번째 칸에.

작가는 화장실 지면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이런 방법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시간을 두고 연재하는 게 아니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연재하는 방식이었다. 다음 편도 꼭 읽고 싶었다. 대걸레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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