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0.14 09:42 수정 : 2014.10.21 10:14

강태식 소설 <36화>



드디어 다음 날이 밝았다. 대걸레는 ‘친구 누나’ 시리즈의 제3편이 연재되어 있는 건물 주위를 오전 내내 배회했다. 건물을 못 찾아서도, 경비가 삼엄해서도 아니었다. 3편 건물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찾을 수 있었다. 2편 건물처럼 상가용 건물이라 출입에도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시리즈의 3편을 구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걸레는 그러지 않았다. 3편 건물에 진입하는 순간, 역시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이토록 부푼 마음을, 이토록 벅찬 설렘을 대걸레는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전 내내 3편 건물 주위를 배회하면서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해결했다. 소화도 시킬 겸, 마음도 가라앉힐 겸 산책도 했다. 그리고 3편 건물 앞에 다시 섰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때가 오후 3시 10분이었다. 한 발 두 발 3편 건물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3층,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

3층 남자 화장실에 도착한 대걸레는 첫 번째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이번에도 바지는 내리지 않았다. 변기 위에 주저앉아 ‘친구 누나’ 시리즈의 3편을 찾았다. 우선 정면을 살폈다. 다음은 좌측 벽을 훑었다. 없다. 없지만 충분히 없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편 때도 그랬다. 연재는 언제나 오른쪽 벽에. 작가의 소소한 습관 같은 걸 알게 된 것 같아 씩,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어보는 대걸레였다. 하지만 대걸레의 입술은 곧 버림을 받은 여자처럼, 배신을 당한 남자처럼 심하게 일그러졌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친구 누나’ 시리즈의 클라이맥스, ‘친구 누나’ 시리즈의 화룡점정, 제3편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상실감이 밀려왔다.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리면 이런 기분일까? 어떻게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대걸레는 깊은 절망감에 울부짖어야 했다.

대걸레는 세 번 네 번 화장실의 벽이란 벽은 모두 샅샅이 뒤졌다. 변기 옆에 쓰레기통이 있었다. 이 속에 있는 거 아니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쓰레기통 속을 뒤져보기도 했다. 혹시 이 칸이 아닌가? 화장실의 모든 칸을 빠짐없이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3편은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의 현실이 모래와 태양뿐인 사막처럼 느껴졌다.

만에 하나 3층이 아닐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대걸레는 3편 건물을 돌아다니며 각 층에 있는 남자 화장실을 꼼꼼히 체크했다. 설마 여자 화장실?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절박한 마음에 위험을 무릅쓰며 여자 화장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여자 화장실에도 ‘친구 누나’ 시리즈의 3편은 없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대걸레는 가로수에 등을 기대고 어둠에 물들어가는 3편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쌩쌩, 도로 위를 달려가는 자동차들이 낯설어 보였다. 그날따라 불야성을 이룬 도시의 불빛도 공허해 보이기만 했다.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마저 대걸레의 쓸쓸함을 어쩌지 못했다.

3편은 없다. 누군가 지워버렸거나,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작가의 일신상에 일어난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연재가 일시적으로 중단된 건 아닐까? 하지만 이유가 뭐든 3편은 없다. 대걸레가 아무리 몸부림치며 거부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었다.

대걸레는 배꼽티와 핫팬츠 차림의 친구 누나가 뼈에 사무칠 듯 그리웠다. 이제 안녕이라고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1편, 2편을 읽는 동안 정도 많이 들었다. 남들은 걸레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한 남자의 가슴속에 뜨거운 불을 지핀 친구 누나였다.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어느새 대걸레의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제 3편 건물은 완전히 어둠에 뒤덮였다. 군데군데 불 켜진 창문이 몇 개 보였다.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걸레는 훗날 누군가도 3편을 찾아 이곳에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왔다가 차디찬 절망만을 맛보고 발걸음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커다란 상실감에 괴로워하며, 얼음처럼 시린 현실에 좌절하며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깊고 공허한 한숨을 토해내지 않을까? 대걸레는 자기처럼 마음의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애절한 마음으로 그려보았다.

다음 날 대걸레는 ‘친구 누나’ 시리즈의 1편과 2편을 차례대로 필사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걸레는 다시 3편 건물 앞에 섰다.

절망과 좌절을 맛본 그날 밤부터 대걸레는 3편 구상에 들어갔다. 자기가 직접 써볼 생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배경과 등장인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2편까지 오면서 전체적인 사건의 윤곽은 물론 나름대로의 개연성도 확보된 상태였다. 흐름상으로 볼 때 3편은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펼쳐지는 부분이었다. 전편이 넘겨준 바통을 받아 그대로 달려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1편과 2편을 필사해온 것도 3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한번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방향을 어디로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단순한 성애 묘사는 피하고 싶었다. 허리를 움직이는 반복적인 행위만을 그대로 묘사하다 보면 글 전체가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표현도 마찬가지였다. 한두 번은 신선할지 모르지만 노골적인 표현도 계속 반복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읽는 독자에게도, 쓰는 작가에게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걸레는 이 문제를 두고 며칠 동안 고민했다. 참고삼아 포르노도 몇 편 봤다. 새로운 체위가 등장하면 자세히 메모하고 그 옆에 간단한 그림도 첨부했다. 피스톤 운동을 하는 합체 부위가 클로즈업되는 장면에는 특히 신경 썼다. 참신한 비유와 적절한 묘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일본 AV라 여자의 교성은 전부 일본어였다. 더러는 아는 단어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말이 더 많았다. 그때마다 대걸레는 일한사전을 뒤져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펜을 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일단 썼다. 분량은 A4 한 장. 세 시간이 걸렸다. 대걸레는 자신이 쓴 글을 차분히 읽어보았다. 반복되는 표현이 너무 많았다. 내용도 빈약했고, 문장 간의 유기성도 부족했다. 행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등장인물의 개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자마자 찢어버렸다. 대걸레는 다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힘든 순간들이 계속됐다. 펜을 쥐고 백지 앞에 앉으면 막막하고 숨이 막혔다. 대걸레는 안방에 쌓여 있는 세계문학 전집을 떠올리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충대충 읽은 적도 많았고, 지루한 부분은 그냥 건너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며 대걸레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세계문학 전집이 있었다. 대문호들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세계문학 전집. 대걸레는 탁 하고 무릎을 쳤다. 한순간 어두운 터널의 저 끝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본 느낌이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강태식의 <가드를 올려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