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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15 09:19 수정 : 2014.10.21 10:14

강태식 소설 <37화>


대걸레는 안방으로 들어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세계문학 전집을 꼼꼼히 살폈다. 그중에서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골라 한쪽에 따로 쌓았다. D. H. 로렌스의 작품들이 제법 있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아들과 연인》, 《무지개》 등의 책들을 먼저 선별했다. 사드의 작품들도 보였다. 《소돔 120일》과 《규방철학》, 이렇게 두 권뿐이었지만 사드라는 이름만으로도 믿음직한 아군을 얻은 것 같아 마음이 든든했다.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와 《토끼는 부자다》도 빼놓을 수 없는 목록이었다. 찾으려고만 하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아나이스 닌의 《헨리와 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등 참고가 될 만한 교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걸레는 이렇게 선별해놓은 책들을 재독하며 꼼꼼하게 내용을 체크했다. 그러다 참고가 될 만한 부분이 나오면 따로 준비해둔 노트에 한 자 한 자 옮겨 적었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보람은 있었다. 잘 쓴 글이란 이런 거구나,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결정적인 순간에 아…… 하고 터져 나오는 한 번의 뜨거운 신음 소리, 정말 압권이었다. 절제미와 완성도가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관능적이고 선정적이었다. 이런 게 진정한 거장의 터치라고 존경하게 되었다. 너무 멋졌다. 반드시 이런 글을 쓰고야 말리라, 대걸레는 의욕을 불태웠다.

세계문학 전집을 필사하는 동안 문장력도 많이 좋아졌다.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붙었다. 시험 삼아 몇 자 적어보기도 했다. 향상된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펜을 쥐고 백지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세계문학 전집에서 발췌한 내용을 참고삼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때로는 좋았던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걸레의 상상력이었다.

그렇게 ‘친구 누나’ 시리즈의 하이라이트 육담, 제3편이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되었다. 이어서 대걸레는 최종회에 해당하는 제4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일단 방향을 잡고 난 뒤라 시리즈의 완결은 어렵지 않게 낼 수 있었다. 물론 화장실 벽을 지면으로 사용하는 글이라 분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탈고한 뒤에 밀려온 그 엄청난 희열이란! 대걸레는 벅차오르는 감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취감을 맛봤다.

여기는 다시 3편 건물 앞. 대걸레는 바로 3층까지 올라가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에 들어갔다. 변기 위에 걸터앉아 문을 잠갔다. 그런 다음 서류가방을 열었다. 거기에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작품이 들어 있었다. 대걸레는 문구점에서 구입한 유성펜을 꺼냈다. 물로 지워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온 필기도구였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왔다. 대걸레는 노트에 쓴 작품을 한 자 한 자 화장실 벽에 옮겨 적었다. 글 하단에 주석을 달아 참고문헌과 인용 부분도 명기했다. 다 쓴 후에 죽 한번 읽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전편에 비해 많이 처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다니! 감개무량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대걸레였다.

3편 건물 옆에는 36층짜리 빌딩이 있었다. 시리즈의 최종회, 제4편은 그 빌딩에 연재할 생각이었다.

※옆에 있는 36층 건물, 2층 남자 화장실, 끝에서 두 번째 칸. 최종회가 이어집니다.

3편 주석 밑에 당구장 표시를 하고 위와 같은 별도의 지시사항도 첨부해두었다.

3편에 이어 4편 연재까지 끝마친 대걸레의 얼굴에는 활짝, 환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났다. 계속되는 경기침체 속에서 매서운 경제한파가 불었다. 실적은 거의 제로였고, 당연히 수입도 없었다. 대걸레는 극심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당장 생활이 어려웠다. 기본적인 공과금조차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여러 기관에서 납부를 재촉하는 독촉장들이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배 째라는 식으로 버텼다. 하지만 독촉장이 경고장으로 변신해서 날아올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식비마저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쌀통을 들여다보면 공포가 밀려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대걸레는 우연히 3편 건물 앞을 지나게 되었다. 3편은 잘 있나? 궁금했다. 누가 지운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자기가 쓴 글이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연재 장소도 기억하고 있었다. 3층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

대걸레의 필적은 어제 쓴 듯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하긴 가끔 궁금할 때도 있었다. 내가 쓴 글을 누가 와서 읽었을까? 읽기는 했을까? 읽었다면 몇 명이나? 좋았을까? 나빴을까? 하지만 연재를 마친 후, 현장을 다시 찾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뜻밖의 반응에 대걸레는 깜짝 놀랐다. 믿을 수 없었다. 대걸레는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감격의 도가니 속에 빠져 허우적허우적 몸부림쳤다. 지금이라면 죽어도 좋다, 잠깐 이런 생각도 했다.

누군가 대걸레의 글을 읽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글 여기저기에 달려 있는 댓글들이 그 증거였다. 하나같이 감탄과 찬사가 가득한 호평이었다. 대걸레는 독자들이 달아준 댓글을 읽으면서 세계와 소통하는 듯한 충만감을 느꼈다.

-짝짝!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놀라운 글입니다.

-이건 명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법 같은 걸작이다!

-너무너무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정말 감동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느낌입니다. 정말 거장의 숨결이 물씬 풍깁니다. 망설이시는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강추합니다!

-대단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격한 몸부림 속에 녹아 있는 슬픔, 관능적인 신음 속에 숨어 있는 비애, 허리를 움직이는 행위조차 이 글에서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치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한 나라의 스펙터클한 흥망성쇠를 송두리째 마주한 듯한 강한 여운이 남는다.

-이 글을 통해 오늘 우리는 야설이 문학으로 승화되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보게 된다.

-이제부터 주석에 있는 소설들을 한 권 한 권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러면 저도 이 글을 쓰신 작가분처럼 언젠가는 멋진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눈물이 핑 돌았다. 격한 감동의 파도가 밀려와 대걸레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대걸레는 벅찬 감격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런 열렬한 반응은 기대하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저는 다만 저처럼 상처받는 사람들이 다시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쓴 것뿐입니다. 모두 행복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쓴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이 기쁨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걸레는 3편 건물에서 나와 4편 건물로 향했다. 4편에 대한 반응 역시 뜨거웠다. 주렁주렁 달린 수십 개의 댓글들이 남은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부탁드려요. 이런 글 계속 써주세요.

-벌써 끝나다니, 너무 아쉽다.

-고전적이면서도 힘이 넘치는 문장. 인간의 내면을 후벼 파는 심도 있는 주제의식. 그리고 이어지는 장중한 결말까지! 한동안 이 글에서 받은 감동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글.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멋진 결말이었습니다. 짝짝!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너무너무 기대되네요.

-여기 앉아서 두 번 발사하고 감.

이런 열광, 이런 찬사, 아! 실로 얼마 만에 누려보는 영광의 순간인가. 학창 시절에 잠깐, 대걸레의 인생에도 꽃피던 봄날이 있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그런 봄날이 없을 줄 알았다. 쓰레기처럼 뒹굴다가 하치장 구석에 처박힌 채 풀풀 냄새를 풍기며 썩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걸레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걸레가 쓴 글에 감동하고, 잘 썼다고, 멋지다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여기에,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독자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부르짖고 싶었다.

더욱더, 더욱더 격찬하고 환호하라!

두 팔을 높이 벌린 대걸레의 눈가에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대걸레는 여전히 초라했다. 도서 외판업에 종사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범국민적인 실업 대열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일개 백수에 지나지 않았다. 실적은 제로였다. 수입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경제적인 압박은 심해져만 갔다. 로프에 등을 기대고 힘겹게 버텨내는 기분이었다. 정타 한 방이면 모든 게 끝이었다. 대걸레는 상체를 움직이며 열심히 날아오는 펀치를 피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링 바닥에 누워서 편안하게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막막했어요.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한번은 한강대교에서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물 위에 둥둥 뜬 채 인천 앞바다까지 흘러갔다. 국가대표 수영선수세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원에게서 이런 질문도 받았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붕, 공중에 몸이 떴다. 풍선처럼 그렇게 이틀을 떠다녔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땅에 대한 미련 따위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도, 돈 때문에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었다. 낮은 아름다웠고, 밤은 신비로웠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배가 고팠다.

“마침 비가 내렸어요.”

비를 맞고 땅에 내려와보니 서울 변두리였다.

“천만다행이네.”

“천만다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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