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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17 09:50 수정 : 2014.10.21 10:14

강태식 소설 <39화>



대걸레는 어떤 모임에도, 어떤 자리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 지면을 매체로 한 만남이 오프라인으로 연결된다는 것 자체가 대걸레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단호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은 거절의 말을 고르기 위해 대걸레는 진땀을 빼야 했다.

죄송합니다. 당분간 집필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걸레의 휴대전화로 다음과 같은 스팸성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앙, 부탁이예용. 제발 한 번만 만나주세용~.

여자가 확실한 말투에 깜짝 놀랐다. 대걸레는 남자 화장실 전문 작가였다. 여성 독자는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독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매춘 알선 업체에서 보낸 스팸 문자라 해도 무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대걸레는 그냥 씹기로 했다. 무시해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대걸레만의 착각이었다. 스팸성 문자는 하루에도 몇 건씩 성실하게 도착했다.

오빠~앙! 오빠 글 읽다가 나 이렇게나 많이 젖어버렸잖아용~. 팬티까지 축축해용~. 이렇게 돼버린 예쁜이를 오빠가 책임져주세용~.

여성 독자든 남성 독자든 어쩐지 삐뚤어지고 음침한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이런 인간들은 한번 상대해주면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진다. 애초에 파고들 여지를 주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씹기로 했다. 대걸레는 일관된 자세로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누군지 몰라도 참 성실했다. 같은 번호가 찍힌 문자메시지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꾸준히 날아왔다.

오빵~. 예쁜이한테 정말 왜 이러세용~.ㅠㅠ

그중에는 이렇게 애절한 내용도 있었다. 내가 뭘? 그러다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예쁜이는 오빠가 누군지 알아. 어디 사는지도, 주민등록번호도 다 알고 있어. 계속 안 만나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예쁜이가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그래도 초지일관, 대걸레는 계속 씹었다. 그러자 예쁜이의 마성이 폭발했다.

죽어! 죽어! 죽어! 집이 활활 불타야 정신 차리겠다 이거지? 오케이. 조만간 휘발유통 들고 예쁜이가 한번 찾아갈게용~.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소름이 쫙 끼쳤다.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정말 휘발유통을 들고 찾아오면 어쩌지? 전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병원을 탈출한 환자 같기도 했다. 아무튼 무서웠다. 밤에는 꿈도 꾸었다. 예쁜이가 대걸레의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있었다. 안 돼! 그만둬! 대걸레는 소리를 지르다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로도 예쁜이의 파상적인 문자메시지 공격은 속사포처럼 계속 쏟아졌다. 악몽 같은 날들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그러다 결국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았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계속 악몽에 시달렸다. 집중력도 많이 떨어졌다. 당연히 글도 쓸 수 없었다. 다음 시리즈를 독촉하는 독자들의 항의 문자가 빗발쳤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대걸레의 머릿속에는 공포와 불안뿐이었다. 한순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계속 눈이 돌아가고, 다리가 떨리고,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이건 완전히 중증 히스테리 말기 증상이었다. 도대체 왜? 뭣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글부글 화가 났다. 너무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입맛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미치는 거구나, 매일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대걸레는 결국 쾅,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 뭐야?

답글은 바로 도착했다.

와~아, 오빠당! 예쁜이는 오빠의 몸 위에서 뛰놀고픈 한 마리 어여쁜 꽃사슴이랍니당~.

역시 위험한 인물이었다. 답글이 하나 더 도착했다.

만나용, 만나용, 우리 만나용~.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한테 왜 이래?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번에도 보낸 즉시 답글이 왔다.

아~앙. 다 알면서~. 예쁜이는 부끄러워서 말 못하겠당~.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만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만나기로 했다. 빨리 만나고 싶다는 문자가 왔다. 내일 만나자는 문자를 바로 보냈다. 어디로 몇 시까지 오라는 메시지도 함께 전송했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대걸레는 최후의 순간까지 고민하고 망설였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쁜이라는 인물은 정상이 아니었다. 갑자기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먼저 예쁜이라는 인물을 파악한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 안전하다는 판단이 섰을 경우에만 만나러 나간다.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약속 장소는 일부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근린공원으로 잡았다. 공원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었고, 그 분수대 주위에는 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벤치가 죽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걸레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분수대에 도착했다. 몸을 숨길 만한 지형지물을 찾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분수대 주변에는 벤치밖에 없었다. 시야만큼은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몸을 숨기기도 그만큼 어려워 보였다.

분수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빨간 벽돌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공원 이용객들의 생리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지어놓은 화장실이었다. 대걸레는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쾌적했다. 들어가자마자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휴지도 확실히 있었고, 냄새도 별로 안 났다. 대걸레는 먼저 화장실에 누가 있는지 체크했다. 칸마다 돌아다니며 노크를 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대걸레는 제일 끝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뒤쪽 벽에 환풍구로 사용되는 작은 미닫이창이 달려 있었다. 대걸레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바로 정면에 분수대가 보이고, 그 주위에 있는 벤치들도 한눈에 들어왔다. 몸을 숨기는 데도 이만큼 안전한 장소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몰래 숨어서 예쁜이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약속 시간 20분 전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공원 이용객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바짝바짝 입 안이 말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음료수라도 챙겨올 걸 그랬다고, 한순간이지만 사치스러운 후회에 젖어보는 대걸레였다.

5분이 지났다. 분수대 주변 벤치에 영감님 한 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림새로 보나, 풍기는 분위기로 보나, 집 근처 공원으로 잠깐 산책을 나온 영감님 같았다. 위아래를 녹색 추리닝으로 통일하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벤치에 앉을 때부터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참 평화로워 보였다. 대걸레의 마음속에도 잠깐 평화가 깃들었다.

5분이 더 흘렀다. 10분 후면 약속 시간이었다. 아직 분수대 주변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떤 인간일까? 생각했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궁금했다. 설마 칼 같은 걸 숨기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걱정도 됐다. 덩치가 크거나 행동이 불안해 보이면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걸레는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돌발상황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이미지트레이닝을 했다.

어느덧 약속 시간 정각이었다. 저절로 손에 땀이 쥐어졌다. 몸 전체가 안테나로 변한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소리, 미세한 움직임에도 과민하게 반응했다. 솨-아, 바람이 꽃잎을 흔들고 지나갔다. 분수대에서 쏘아 올린 물줄기가 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대걸레의 감각은 과열된 상태였다.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은 살짝만 건드려도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10분이 더 지났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허탈한 마음도 있었다. 만나서 결판을 내고 싶었다. 왜 안 나오는 거야? 갑자기 용감무쌍해진 대걸레였다. 막상 만나자고 강하게 나가니까 오히려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감춘 것 같았다. 손에 붕대를 감고 글러브까지 꼈는데 상대 선수가 휙 수건을 던진 기분이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팽팽했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어졌다. 단단하게 뭉쳐 있던 온몸의 근육도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피로가 맹렬하게 몰려왔다. 대걸레는 잠시 변기 위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자꾸 하품이 나왔다.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일이 일단락된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언제 문자가 날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겁낼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쪽에서 세게 나가면 꼼짝 못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대걸레는 이 정도면 됐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잠금장치를 풀고 변기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바로 그 때였다. 휴대전화 착신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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