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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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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40회>
액정에는 예쁜이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이유가 없었다. 계속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정면승부를 펼치자고 생각했다. 대걸레는 꾹,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야! 너 지금 거기 어디야? 당장 나왓!”
전화를 받자마자 성난 목소리가 울부짖었다. 분명 남자였다. 깜짝 놀란 대걸레는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통화내용을 복기했다.
“야! 너 지금 거기 어디야? 당장 나왓!”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으면 낼 수 없는 울분에 찬 외침이었다. 순간 대걸레의 뇌리에서 무서운 생각 하나가 강한 파장을 일으키며 스쳐 지나갔다. 오소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대걸레는 다시 환기창 밖을 빼꼼 내다보았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는 영감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걸레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방금 착신된 번호를 찾아 액정 화면에 띄웠다. 조심스럽게 꾹, 통화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드르륵, 드르륵……. 신호가 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휴대전화 벨 소리가 들려왔다. 곧 벤치에 앉아 있던 영감님이 휴대전화를 꺼내드는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만큼 충격이 컸다. 믿어지지 않았다. 대걸레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걸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영감님의 웃는 얼굴에서 무서운 광기가 느껴졌다. 대걸레의 몸 위에서 뛰놀고픈 한 마리 어여쁜 꽃사슴이 저기에 앉아 있었다. 지긋한 연세의 남자 꽃사슴이었다. ‘오빠~앙’이라고 불린 지난날을 생각하면 분했다. ‘팬티까지 축축해용~’이라는 문자도 떠올랐다. 요실금을 앓고 계신 영감님 같았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저한테 대체 왜 이러세요~오?
일단 문을 열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건물 모퉁이에 숨어서 몰래 영감님을 훔쳐봤다. 다행히 영감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였다.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움직이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걸레는 화장실 건물에서 벗어나 한 발 한 발 작두 타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은 영감님의 일거수일투족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조심조심, 몰래몰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가 대롱대롱 턱 끝에 매달렸다. 몸도 마음도 쾅,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그 전까지 세상은 참 고요했다. 멀리서 자동차 몇 대가 부-웅, 아련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짹짹, 정겨웠다. 큐오오, 하늘을 가로지르는 여객기의 엔진 소리마저 아득하기만 한 한때였다. 그때,
“따르릉, 따르릉!”
대걸레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착신음이 울렸다. 진동 모드로 설정해둘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대걸레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 화면에 찍힌 번호를 보는 순간 으악!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발신인은 예쁜이였다.
영감님이 대걸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몸에 가려 있던 영감님의 오른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영감님의 오른손에는 꼬옥, 휴대전화가 쥐여 있었다.
“뭐 해? 전화받아!”
영감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탁, 숨구멍이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 당황한 대걸레는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다시 영감님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스마일, 웃고 있었다. 미친 사람 같았다. 무서웠다. 빨리 도망쳐! 대걸레의 머릿속에서 위험경보가 울렸다.
“야, 너!”
영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대걸레는 그걸 출발신호로 스타트를 끊었다.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전력 질주했다. 물론 이런 회의도 들었다. 근데 왜 뛰는 거야? 하지만 바로 물리쳤다. 잔말 말고 뛰어! 미친 사람이 쫓아오잖아. 대걸레는 무작정 달렸다.
영감님이 대걸레의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야, 거기 서! 거기 안 서! 잡히면 가만 안 둬!”
대걸레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대한 피치를 올렸다.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
공원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누구에게 잡힐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소매치기도 아니고, 뛰면서도 억울했다.
“학, 학…….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학, 학…….”
달리면서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뭐라고? 안 들려.”
저 영감님이 가는귀를 자셨나?
“헉, 헉……. 그러니까 저한테 대체 왜 이러시냐고요? 헉, 헉…….”
“안 들린다는데도 그러네. 뭐라는 거야?”
숨이 차서 발음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앞에다 대고 말하기 때문에 안 들리는 걸지도 몰랐다. 대걸레는 크게 한번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헥, 헥……. 영감님이요, 저한테요, 대체 왜……. 으악!”
쾅! 무언가와 강하게 부딪혔다. 전봇대 같았다. 순간 눈앞이 노랗게 떴다.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자유로워질 테야. 대걸레는 의식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왜 전봇대 같은 게 공원 한복판에?
전봇대가 아니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사실 그건 〈어느 날 거인이 나타나서 거대한 돌 말뚝을 박았습니다〉라는, 괜히 제목만 길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느 유명 예술가의 조각품이었다.
고개를 돌린 게 실수였다. 〈어느 날 거인이 나타나서 거대한 돌 말뚝을 박았습니다〉와 온몸으로 충돌한 대걸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머릿속의 전원이 팟- 하고 나가버리는 느낌이었다. 전력질주로 달려왔기 때문에 충격도 그만큼 컸다. 기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웃겼다. 슬랩스틱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나저나 거인은 왜 이런 곳에다 돌 말뚝 같은 걸 박아놓은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 아지트더란다. 눈을 뜨자마자 흐린 시야 가득 스마일 영감님의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야, 괜찮아?”
대걸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왜 그랬는지 물어봤어?”
“환불 때문에 그랬대요. 계속 안 만나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무슨 환불?”
“구독료 환불이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대요.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나태해져만 가는 작가 정신과 매너리즘에 젖어가는 필자의 모습이 눈에 보이더래요. 날로 먹겠다는 식의 뻔한 이야기로 언제까지 독자들을 실망시킬 거냐고, 작가는 독창성과 치열함이 생명인데 넌 작가로 치면 이미 시체나 다름없다고, 꾸중만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거래?”
“네. 구독료 환불은 경종을 울려주자는 취지였대요. 아끼는 작가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독료 환불을 요구한 거랬어요.”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대걸레는 수줍게 고백한다.
“글은 요즘도 계속 써?”
“일단은 작가니까요. 독자들의 기대도 있고 하니까…….”
“외판원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로 나갈 생각은 없어?”
“모르셔서 그래요. 우선 육담 작가라고 하면 명함이 되지 않아요. 게다가 대한민국 전업 작가라는 게 생계위협형, 극빈보장형 직업이거든요. 아무래도 투잡을 뛰지 않으면 불안해요.”
인기도 전 같지 않다고 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독자층도 많이 얇아졌어요. 인터넷에서 결제만 하면 야동은 얼마든지 받아볼 수 있잖아요. 자극성이나 생동감에서 육담은 상대가 안 되죠. 스마트폰도 그래요. 요즘 사람들은 걸어 다니면서도 스마트폰을 하잖아요. 문자매체는 발붙일 자리가 없죠.”
대걸레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군.”
“그렇죠.”
그리고 다시 거짓말 훈련이다.
“시작합니다.”
땡, 공이 울린다.
“피부가 좋으시네요. 비결이 뭐……. 웩!”
아직 갈 길이 멀다. 바로 입을 틀어막는다. 화장실로 달려가는 대걸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너도 참 사는 게 힘들겠다. 가서 등이라도 토닥거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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