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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24 09:17 수정 : 2014.10.24 09:17

강태식 소설 <44화>



“3차까지는 의무야.”

대한민국에는 의무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그리고 그날 우리 일동은 3차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추 부장의 진두지휘를 받으며 다음 전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오늘은 못 가. 내가 신선해 씨랑 이렇게 꼭 한 번 한잔하고 싶었단 말이야.”

용 과장의 마수에 걸려들 신선해 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신선해 씨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영혼을 빼앗긴 좀비처럼 어딘지도 모를 3차 장소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훌쩍, 자정이 넘은 시간. 회식의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였다. 동료애가 새록새록 돋아나지도 않았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거나 하하하, 웃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지친 얼굴이었다. 눈이 침침했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3차는 과연 직장인의 의무인가? 이런 회의에 빠져 3차가 법으로 금지된 미래의 대한민국 사회를 그려보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 중에는 부상병도 한 명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버리고 가.”

만신창이가 된 마 대리는 빼는 게 더 깔끔할 것 같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추 부장이라는 대형 트럭에 치이고 난 뒤라 잘 걷지도 못했다. 내 부축을 받으며 겨우겨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12라운드 내내 맷집 하나로 꿋꿋하게 버텨온 청 코너의 도전자 마 대리. 하지만 마 대리의 그런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는 몸이 안 좋아서 그만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긴 어딜 가? 진통제 사줄 테니까 따라와.”

넥타이와 양복 재킷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겨우 건진 와이셔츠는 한쪽 팔이 뜯겨나간 불구였다. 그나마 단추마저 전부 털리고 없었다. 걸레로 변한 러닝셔츠가 마 대리의 몸에 축, 힘없이 걸려 있었다. 머리는 직격탄을 맞은 듯 산발이었고, 무차별 공격이 집중되었던 두 눈은 이제 시야를 가릴 정도로 퉁퉁 파랗게 부어 있었다. 호흡도 거칠고 불규칙했다. 쌍코피가 터진 코를 휴지로 막아놓았기 때문에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피에 절어 붉게 물든 휴지가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았다.

“진통제 먹었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마 대리가 옆에서 괴로워하는데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 마 대리. 그런 마음이었다. 그래도 이빨에 물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3차는 노래방이었다. 거기에서도 술을 시켰다. 캔 맥주를 마시고 서비스로 나온 새우 맛 과자를 씹으며 노래를 불렀다.

“30점!”

추 부장이 채점한 신선해 씨의 노래 점수였다. 어디서 개가 짖나? 추 부장이라는 장애물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신선해 씨의 초연한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20점!”

용 과장의 노래 점수는 신선해 씨보다 10점이나 낮았다. 하지만 용 과장은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저 푸른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다니는 처세술의 대마왕이다.

“20점이면 현재까지는 2위 아닙니까. 역시 대장님은 후하십니다.”

현란한 기술을 발휘하며 추 부장이라는 장애물을 가지고 논다. 내가 너무 후했나? 추 부장은 기분 좋아 좋고, 용 과장은 점수 따서 좋다. 잠깐 용 과장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생각했다. 존경합니다.

“다음은 마 대리 차례.”

마이크가 마 대리에게 넘어갔다. 아까부터 통증을 잊으려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계속 술만 마셔대고 있다. 육체의 통증보다 마음의 통증이 더 심한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입술이 찢어져서 노래는 못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차례는 이 몸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마 대리가 내게로 마이크를 넘겼다. 솔직히 노래는 별로였다. 즐겨 듣지도 않지만 잘 부르지도 못했다. 아는 노래도 몇 곡 없었다. 1차에서 밥을 먹고, 2차에서 술을 마신 다음, 어쩌다 보니 3차 노래방까지 흘러왔지만, 선곡 책자를 펼칠 때마다 거래 장부를 검토하는 기분이었다. 빙글빙글, 미러볼이 돌아갈 때면 머리가 어지러웠고, 좁은 방에 들어가 여러 사람 사이에 끼어 앉아 있으면 공기도 탁하고 자리도 불편했다. 누가 노래방에 탬버린 같은 걸 비치해놓은 것일까? 박자를 못 맞춘다고 핀잔도 여러 번 들었다. 놀이공원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노래방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취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3차로 놀이공원에 가는 사람들은 없다. 대부분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를 잡고 탬버린을 흔든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노래방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게 아니면 3차로 놀이기구를 타는 건전한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무튼 나처럼 노래방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참 살기 힘든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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