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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27 09:15 수정 : 2014.10.27 09:15

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강태식 소설 <45화>



일단은 아는 노래 한 곡을 골랐다. 랩이 들어간 노래나 빠른 노래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제외시켰다. 높이 올라가는 노래도 뺐다. 그래서 느리고 무난한 노래를 고르게 되었다. 동요풍의 건전한 전주가 흐르자마자 용 과장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화장실에 가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화면에 가사가 뜨면서 노래가 시작되었다. 술로 아픔을 달래고 있는 마 대리가 계속 신경 쓰였다. 신선해 씨는 저쪽에 앉아 선곡 책자를 넘기고 있었다. 내 노래 같은 건 듣고 있지 않았다.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왜 노래를 시켰는지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내 노래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추 부장뿐이었다.

“음정도 불안하고 박자도 엉망이야. 무엇보다 선곡이 별로야. 3점!”

30점 다음에 20점이었으니까, 20점 다음에는 10점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 점수보다 7점이나 낮은 3점이었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신경 쓸 것 없어, 마음속으로 위로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넘어가고 싶었지만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점수에 불만 있어?”

점수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신선해 씨처럼 초연하지도, 용 과장처럼 능수능란하지도 못한 나 자신이 미웠다. 바닥에서 발이 떨어지고, 몸이 공중에 붕 뜬 느낌이었다. 어디론가 둥실둥실 날아갈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대장님도 한 곡 뽑으셔야죠.”

어느새 입실한 용 과장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추 부장의 애창곡이었다.

“오늘은 목 상태가 별론데……. 그래도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한 곡 불러볼까?”

전주가 흐르는 동안 추 부장은 마이크를 손에 쥐고 한껏 폼을 잡고 있었다. 용 과장이 탬버린을 들었다. 탬버린은 세 개였다. 마 대리 손에 하나, 내 손에도 탬버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전주부터 탬버린을 흔들었다. 용 과장이 일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 음악에 맞춰 율동도 했다.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추 부장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추 부장의 노래는 한 소절 늦게 시작됐다. 한 소절씩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음정과 박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많이 들어본 노래였지만 그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고문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귀가 괴로웠다. 하지만 귀만 괴로운 게 아니었다. 정말 괴로운 건 마음이었다. 탬버린을 흔들면서, 율동을 곁들이면서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나 같은 놈을 낳고 미역국을 드신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의 장래희망은 과학자였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과학자는 포기했다. 고등학교 때는 교사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교사의 꿈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대학교 때 알았다. 그래도 그때는 꿈이 있었다. 영어단어를 암기하면서 공무원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공무원의 벽은 높기만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청년 장기 실업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건강한 항문을 무기로 자위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장래희망도, 원대한 꿈도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뛰어넘어야 할 허들이 너무 많았다. 하는 일도 없이 바쁘게만 살았다. 한 발 한 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며 밑바닥까지 와버린 느낌이었다. 탬버린을 흔들면서 나는 누구지? 생각했다. 율동을 하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추 부장의 노래 고문도 어느덧 중반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노래방 기기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망치가 없었고, 무엇보다 용기가 없었다. 누가 멈춤 버튼 좀 눌러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신선해 씨를 바라봤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선곡 책자를 넘기고 있던 신선해 씨의 표정, 잊을 수 없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여기는 지옥인데, 우리는 지옥의 주민인데, 신선해 씨 혼자만 딴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다.

“잠깐 편의점에 갔다 올게요.”

2차에서 3차로 넘어가던 중, 신선해 씨가 후다닥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뭘 샀는지 물었지만 신선해 씨는,

“비밀.”

이렇게만 대답했다. 그래서 여성용품을 구입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여성용품이 아니었다. 3차 노래방 코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 귀마개였다. 또 한 번 훌쩍, 허들을 뛰어넘어 달려가는 신선해 씨의 위용이 존경스러웠다.

빠른 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 만신창이가 된 마 대리의 상태도 체크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시퍼런 피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율동을 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찡하게 가슴이 아려왔다. 부상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마 대리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누구지?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거야, 이런 교훈도 얻었다. 한이 담겨 있는 춤사위였다. 흥겨운 탬버린 소리에도 체념과 애환으로 점철된, 하지만 이제는 신명으로까지 승화된 묵직한 한이 서려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간주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추 부장의 노래는 이번에도 한 소절 늦게 들어갔다. 그렇게 또다시 지옥의 문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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