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46화>
이마에 넥타이를 맸다. 먼저 솔선수범하는 용 과장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 두루마리 휴지를 머플러처럼 목에 둘렀다. 용 과장은 길게 뽑은 두루마리 휴지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살풀이춤 비슷한 동작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는 양복바지 한쪽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모내기 춤을 췄다.
“따이! 따이!”
어디서 기합 소리가 들리기에 봤더니 마 대리였다. 이빨로 과자 봉지를 찢으면서 차력 쇼를 펼치고 있었다.
한 포기 두 포기, 모내기 춤을 추면서 생각했다. 모두 미친 것 같았다. 두루마리 휴지를 양손에 쥐고 이마에 맨 넥타이를 상모처럼 돌리면서 살풀이춤을 추고 있는 용 과장도, 아픈 몸을 이끌고 이제는 노래방 소파를 이빨로 끌면서 차력시범을 선보이고 있는 마 대리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이크를 들고 있는 추 부장은 칼에 막걸리를 뿜어대는 망나니 같았고, 선곡 책자를 벗 삼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신선해 씨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한 포기 두 포기, 물도 없는 카펫 위에 정성껏 모를 심는 걸 보면 나 역시 미친 것 같았다. 하지만 미치지 않으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닭장 같은 서울에서, 자동차 매연을 호흡하며, 쥐꼬리만 한 월급 때문에, 때로는 돈과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자기 시간 희생하면서, 가정까지 내팽개치면서, 권모술수도 쓰고, 아부도 하고, 안 되면 협박도 하고,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도 하면서,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적금 부은 돈으로 죽기 전에 내 집 한 채 장만하려면, 아들딸 대학도 보내고, 결혼도 시키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노후도 대비하려면, 대한민국에서는 미칠 수밖에 없다. 한 포기 두 포기, 모내기 춤을 추면서, 농약도 치고 비료도 줄 테니까 가을이 될 때까지 무럭무럭 잘 자라렴, 마음속으로 이런 당부도 하면서, 지금까지 나태와 게으름으로 살아온 지난날을 반성해보기도 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진도 10에 육박하는 지진이 제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습니다. 정말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였습니다. 빵빠라밤! 100점!”
추 부장의 노래가 끝나고, 간단한 심사평과 함께 점수를 매기는 용 과장을 보면서, 미친놈의 완전체, 미친놈의 끝판왕을 보는 기분이었다.
신선해 씨가 마이크를 잡는 걸 보고, 잠깐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카운터 옆에 소파가 있었다. 거기에 앉아서 잠깐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어두운 조명, 탁한 공기, 무엇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3차의 후폭풍일까? 상대 선수가 날린 어퍼컷처럼 훅,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취객 세 명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넥타이 부대들이었다. 셋 다 어지간히들 취한 것 같았다. 한 명은 구두를 잃어버렸는지 양말만 신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양복 재킷을 치마처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이마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나머지 한 명은 기절한 것 같았다. 둘의 어깨에 한쪽씩 팔을 걸치고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사장님, 여기 몇 번 방이에요?”
한 사람이 계산을 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기절한 친구를 흔들어 깨웠다.
“야, 연석아. 내 말 들려? 내 말 들리면 대답해봐.”
“응…….”
연석 씨가 힘겹게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들린다는 신호를 보냈다.
“3차까지는 의무야.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연석아.”
연석 씨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떡였다. 아, 추 부장의 말이 옳았다. 나는 3차가 국민의 의무인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연석아,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왜 노래방 입구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넥타이 부대의 비장한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세상은 전쟁터가 아닐까, 생각했다.
노래방 밖으로 나왔다. 둥근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고, 반짝반짝 작은 별들이 참새 떼처럼 빛나고 있었다. 신선한 밤공기를 호흡하며 취기를 몰아냈다. 좌우로 몸을 흔들면서 간단한 스트레칭도 했다. 먹구름이 거치듯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도망갈까? 노래방 입구를 보면서 갈등도 많이 했다.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어, 유혹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차피 나 같은 인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냥 갈까? 나도 모르게 두 발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저 높이, 밤하늘에 둥둥 떠 있는 애드벌룬이 보였다. 그 애드벌룬 때문에 발걸음을 돌렸다. 이대로 도망치면 애드벌룬처럼 될까 봐 무서웠다.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노래방에 들어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스피커에서는 용 과장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말 외롭고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날 회식이 자위회사의 마지막 회식이라는 것을. 더 외롭고 힘든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저 먼 우주에서 날아온 거대 운석이 지구와 충돌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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