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47화>
“야, 밟지 마!”
그날 밤, 술김에 잠깐 들러본 아지트에서 물컹한 덩어리 같은 걸 밟고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녹색 추리닝을 입고 계신 영감님이었다. 평소에도 녹색 매트 위에 누워 계시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조심하지 않으면 어디서 어떻게 밟게 될지 모른다.
“죄송해요.”
다치신 곳은 없나, 살피며 바로 사과했다. 괜찮아, 너는 몸무게가 없으니까 하나도 안 아파, 하지만 기분이 나빠, 영감님이 툭툭 자리를 털며 일어나 앉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 그렇다고 딱히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어쩌면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사람 냄새 나는 누군가의 체온이 시리도록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붕들의 아지트까지 택시를 잡아타고 오게 되었다.
“저 때문에 깨셨어요?”
대답 대신 영감님은 스마일, 웃기만 했다.
“왔으면 앉아.”
아지트는 뜰채 같은 걸로 소리를 걷어낸 듯 조용하기만 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에 마음마저 울적해지는 그런 밤이었다.
“술 마셨어?”
“예, 한잔했습니다.”
회식이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뭐, 힘든 일 있어? 얼굴이 안돼 보여.”
슬쩍, 조심스럽게 장판을 들추듯 영감님이 물었다. 갑자기 울컥하고 설움이 복받쳤다. 힘든 일이요? 힘든 일은 많았다. 사는 게 그냥 힘들었다. 아무리 달려도 인생이라는 마라톤 코스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힘이 빠졌다. 계속 추월만 당했다. 뒤로 밀려날수록 사는 게 더 힘들었다.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도, 몸부림쳐봐야 별수 없는 현실도 힘들었다. 땅에 발을 붙이며 사는 것도,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도, 그날따라 나에게는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힘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야.”
정말일까?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 오르막의 어딘가에도 끝이 있는 걸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리다 보면 정말 내리막이 나오는 걸까?
“그럼. 힘든 오르막이 없으면 편한 내리막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편한 내리막보다 몸은 힘들지만 영차영차 힘을 내서 올라갈 수 있는 오르막이 좋은 거야. 내리막이 나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영감님의 따뜻한 스마일은, 보고 있으면 언제나 힘이 된다.
“자, 이렇게……. 우선 주먹을 쥐어봐. 그런 다음 두 팔로 가드를 올리는 거야.”
현역 권투선수처럼 가드를 올린 영감님이 상체를 좌우로 흔들면서 시범을 보인다.
“날아오는 펀치는 어쩔 수 없어. 중요한 건 가드야. 아무리 맞아도 끝까지 버티면 판정까지는 가. 그다음은 모르는 거야. 혹시 알아? 네 손이 번쩍 올라갈지…….”
영광의 순간을 그려보았다. 관중들의 환호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스마일, 웃고 있는 영감님을 향해 가드를 올렸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상체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고맙습니다, 영감님.
“팔을 가슴 쪽으로 바짝 붙여. 주먹은 이렇게, 눈높이쯤에 맞추고…….”
이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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