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48화>
7.
“그냥 힘이 아니다. 내공의 힘이다.”
내공의 힘이라는 건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 몸에는 기라는 게 흐른다. 연마를 통해서 그 기를 한곳에 모을 수 있다. 그게 바로 내공이다.”
내공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칼도 되고 방패도 된다. 이런 설명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현실감이 사라진다. 무협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버린 기분이다. 잠깐씩 정신이 들 때마다 이 아줌마는 정상이 아니야, 멀리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무당파의 당주인 장삼풍.
“김용의 무협소설 《영웅문》에 나오는 그 장삼풍이요?”
“그렇다. 그 장삼풍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한때는 주먹계를 주름잡던 무당 3대협의 리더였다. 왠지 화려한 프로필이다.
가장 증오하는 인물은 돌주먹.
“근데 돌주먹이 누구예요?”
“내 남편이다.”
아지트에서 매일 무술을 연마하는 것도 남편인 돌주먹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 멀었다. 한 방에 보내야 한다. 아니면 내가 당한다.”
가정폭력 같은 말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남편에게 맞아서 저렇게 됐는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현실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때 몸무게도 함께 잃었다. 머릿속에서 자꾸 이런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그래도,
“남편분과 사이가 안 좋으신가 봐요.”
일단은 그렇게 된 사연을 본인에게서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식칼 아줌마는 어렸을 때부터 무협소설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부친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락방에는 책장이 누렇게 바랜 무협소설들이 노끈에 묶여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부친의 소장품이었다. 식칼 아줌마는 그 무협소설들과 함께 자랐다. 학교에 들어가서 글을 깨우친 식칼 아줌마는 시간만 나면 다락방에 틀어박혀 무협소설들을 읽어나갔다. 한 권 한 권 정신이 팔려서 독파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물고 달력이 넘어갔다. 쾨쾨한 곰팡내를 맡으며 무협소설에 심취해 있던 그때를 식칼 아줌마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한때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식칼 아줌마의 눈앞에는 퍽퍽 주먹과 주먹이 오가고, 챙챙 칼과 칼이 맞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무림고수들과 절대미인들이 식칼 아줌마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무협소설 속의 세계는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고 현란했다. 영웅호걸의 의협심에 감동을 받았고, 남녀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다.
식칼 아줌마는 그중에서도 특히 《신조협려》의 두 주인공인 아미파의 창시자 곽양과 무당파의 1대 당주 장삼풍의 로맨스에 열광했다. 《의천도룡기》에 보면 아미파의 제자 중 하나가 장삼풍을 비꼬는 장면이 나온다. 장삼풍이 곽양을 잊지 못해 장가도 가지 않고 혼자서 늙어간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식칼 아줌마는 그런 장삼품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래서 장삼풍을 존경하는 인물 1순위로 정하게 되었다. 2순위는 당연히 곽양이었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사랑의 경공술로 둘만의 하늘을 다정하게 날고, 얼굴이 보고 싶을 땐 그리움의 축지법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는 그런 사랑을 꿈꾸었다. 사뿐사뿐 물 위를 걸어 다니며 사랑을 속삭이면 얼마나 멋질까? 식칼 아줌마는 어쩜, 어쩜, 감탄사를 연발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식칼 아줌마는 집 근처에 흐르는 개천에 나와 무협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상류에 위치한 도축장 때문에 개천에는 언제나 피와 내장 같은 오물이 떠다녔다. 물도 탁하고 냄새도 지독했다. 하지만 식칼 아줌마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독서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곳을 자주 찾곤 했다.
거지꼴을 한 화교 하나가 개천에 나타난 그날도 식칼 아줌마는 풀밭에 앉아 무협소설을 읽고 있었다. 늦봄이라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더위는 초여름 이상이었다. 햇볕이 쨍하고, 그늘이 시원해 보이는 그런 날씨였다. 뚜벅뚜벅, 개천까지 걸어간 화교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으로 물을 뜨는 모습도 보였다. 개울물로 갈증을 달래려는 것 같았다. 식칼 아줌마는 깜짝 놀랐다. 저 물을 마시면 죽을지도 몰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식칼 아줌마는 화교를 향해 달려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그 물 마시면 안 돼요!”
고개를 든 화교와 급하게 달려온 식칼 아줌마의 눈이 마주쳤다. 척 봐도 화교는 보통 사람 같지 않았다.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어떤 힘 같은 게 느껴졌다. 식칼 아줌마는 손짓 발짓으로 화교에게 말했다. 이 물은 마시면 안 돼요. 마실 물을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런 다음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길바닥에 떨어져 있던 빵 봉지 두 개를 주울 수 있었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 그 빵 봉지 가득 물을 담았다. 하지만 뚫린 구멍으로 줄줄 물이 샜다. 두 개 다 그랬다. 식칼 아줌마는 다시 개천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식칼 아줌마가 개천에 도착했을 때, 다행이었다. 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화교도 아직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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