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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07 09:11 수정 : 2014.11.07 09:11

강태식 소설 <54화>



“그때 내 머릿속에는 딱 두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자는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좌절감과 이대로 가다가는 나까지 당하고 말 거라는 두려움…….”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손에 닿을 듯한 곳까지 밀려왔다. 식칼 아줌마는 마지막 남은 내공을 모두 쥐어짰다. 경공술로 몸을 날려 일반주택 지붕 위로 피신했다. 다행히 돌주먹은 경공술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신 벽과 건물을 부수며 식칼 아줌마를 추격해왔다.

식칼 아줌마는 계속 경공술을 쓰며 지붕과 지붕 사이를 날아다녔다. 뒤에 남겨진 소소와 아령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상도 심했다. 결국 식칼 아줌마는 공사 중인 건물로 몸을 숨겼다.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대자마자 바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 콜록콜록, 기침이 나왔다. 기침과 함께 피도 토했다. 입 안에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그제야 식칼 아줌마는 자신의 내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다행히 돌주먹의 추격은 따돌린 것 같았다. 하지만 살기를 감지할 수 없는 상대였다. 식칼 아줌마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밤은 고요했다. 가끔 고양이 울음소리가 발작하듯 들려오기도 했다. 만약 여기서 발각된다면……. 식칼 아줌마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한 상태였다. 더 이상은 도망칠 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내공이 절륜에 이른 고수가 아니었다면 지금 숨이 끊어진다 해도 이상한 게 없는 중상이었다.

삭막한 콘크리트 구조물 너머로 어두운 밤하늘이 검은 융단처럼 무겁게 깔려 있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첫날밤을 훔쳐보기 위해 누가 뚫어놓은 손가락 구멍 같았다. 식칼 아줌마는 그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뚝뚝,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했다, 식칼 아줌마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존재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적에게 등을 보인 자신의 비겁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소와 아령, 사랑하는 두 아우를 남겨두고 온 일이 마음을 괴롭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식칼 아줌마는 자신마저 잊고 있었다. 오직 소소와 아령의 얼굴만 젖은 눈앞에 어른거렸다.

돌주먹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소소와 아령도 다른 피해자들처럼 살아 있을 것이다,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해봤지만 깊게 파인 자책감의 골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나는 신의로 맺어진 형제들의 믿음을 배신했다, 비굴한 목숨을 건지기 위해 형제들을 버렸다, 나는 배신자다……. 식칼 아줌마는 뼛속 깊이 파고드는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죽을 수만 있다면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내상이 너무 깊었다. 온몸이 마비된 상태라 죽을 수도 없었다. 등 뒤로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머리카락은 백발 마녀처럼 하룻밤 사이에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침 햇살 속에서 눈부신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식칼 아줌마의 지금 머리가 새까만 흑발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한 달에 두 번씩 염색을 한다.”

동이 트자, 식칼 아줌마는 즉시 동생들을 찾아갔다. 소소와 아령은 전날 당한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식칼 아줌마는 둘을 병원으로 옮겼다. 검사 결과 둘 다 하반신 불수 판정을 받았다. 식칼 아줌마는 땅을 치며 오열을 토했다.

“으아아아!”

병원의 모든 유리창들이 일시에 박살 났다. 진도 7에 육박하는 강한 진동이 약 10초간 병원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식칼 아줌마의 슬픔과 분노는 그만큼 크고 깊었다.

얼마 후, 지역의 3대 유지인 김가, 윤가, 오가들마저 돌주먹에게 당하고 말았다. 은신처에 숨어서 소소와 아령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있던 식칼 아줌마는 뒤늦게 이 비보를 접하고 분한 마음에 치를 떨었다. 돌주먹이 저지른 인면수심의 악행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몸도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씩 쌓이는 내공은 소소와 아령을 치료하는 데 썼다. 당장 식칼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와신상담, 섶에 누워 잠을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핥으며 훗날을 기약할 뿐…….

지역 3대 유지가 몰락하자 그날부로 경제적인 지원도 끊어져버렸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며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의를 쫓아 무림을 떠돌 뿐 재물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통장의 잔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소소와 아령마저 불구가 된 터라 두 아우를 부양하는 데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식칼 아줌마는, 비록 무당 3대협의 리더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무림을 주름잡던 영웅호걸이라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보자면 일정한 수입이 없는 일개 실업자에 불과했다.

“언니, 배고파.”

주린 배를 움켜잡는 아령의 모습을 보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막내가 철없이 하는 말이니 사형은 마음 쓰지 마십시오.”

소소의 고마운 한마디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때부터 식칼 아줌마는 격일로 발행되는 생활 정보지를 뒤지거나 취업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력도 없었고 자격증도 없었다. 학력도 고졸이 전부라 사무직이나 경력직의 길은 처음부터 막혀 있었다. 2차 면접까지는 가보지도 못했다. 1차 서류전형에서도 매번 미끄럼틀을 타야 했다. 결국 식칼 아줌마는 영업직이나 판매직, 서비스직 같은 쪽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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