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73화>
그게 벌써 사흘 전 일이다. 한 번에 다섯 박스씩, 모두 열 박스니까 두 차례에 걸쳐서 집으로 옮겼다. 지금은 그 바이브레이터 박스들이 안방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쌓아둘까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 두면 습기 때문에 망가질 것 같았다. 다음으로 부엌을 고려해봤다. 이렇게도 쌓아보고 저렇게도 쌓아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안방에 들여놨다. 반지하 단칸방이라 방이 하나뿐이다. 그 하나뿐인 방을 바이브레이터 열 박스가 차지해버렸다. 그래서 요즘 나는 부엌으로 쫓겨나 생활하고 있다.
그래도 이런 장점은 있다. 우선 화장실이 가까워서 좋다. 이 집의 실크로드는 부엌이다. 어디를 가든 부엌을 거쳐야 한다. 부엌에서 생활하면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때그때 가면 된다. 현관도 그만큼 가까워졌다. 성큼 한 발짝 사회로 진출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부엌은 사회로 출격하기 위한 교두보인 셈이다. 안방에서 지낼 때보다 한층 적극적으로 변모한 나를 느낀다. 냉장고와 함께 생활하는 것도 커다란 장점 중의 하나다. 음식이 가까이 있을수록 든든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우-웅,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백만 대군을 얻은 듯 왠지 모르게 힘이 난다. 텔레비전은 안방에 있다. 부엌에서 생활하는 요즘, 텔레비전 대신 라디오를 듣는다. 서정적인 발라드곡은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된다. 신 나는 댄스곡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클래식 음악을 청취하고 있다.
“책 좀 빌려줄래?”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들으면서 대걸레에게 빌려온 세계문학 전집을 읽는다. 하루에 한 권씩, 사흘 동안 벌써 세 권이나 읽었다. 한층 성숙한 교양인으로 새롭게 거듭난 기분이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장점들이 많다. 물을 만지는 일이라 설거지를 하고 나면 몸이 급격하게 피곤해진다. 싱크대 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기 때문에 바로 누울 수 있다. 잠자리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싶은 분이라면 부엌에서의 생활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상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냥 반찬 몇 가지 꺼내고, 그릇에 밥만 푸면 된다.
단,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필수다.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안분지족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일이다. 안방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자. 안방 문을 닫아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안방에 미련이 있는 자는 부엌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찾을 수 없다. 부엌으로 밀려났다고 자책하는 자의 마음에는 평화와 안식이 찾아오지 않는다.
지금도 라디오에서는 클래식이 흐른다. 막 설거지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다. 냉장고가 옆에 있고, 그 속에 음식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마지막으로 안방에 들어간 게 사흘 전이다. 안방 문은 그때 닫아두었다. 지금은 안방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늘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안분지족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안방에서 밀려났다는 자책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덕분에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득 외로워질 때도 있다. 싱크대 하수구에서 시궁창 냄새가 고독처럼 올라올 때, 우-웅, 냉장고 소음이 바람 소리처럼 마음속 깊은 거기를 할퀴고 지나갈 때, 그럴 때면 어김없다.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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