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77화>
아지트 창문 하나가 활짝 열려 있다. 날씨가 맑은지 반짝반짝 별이 빛난다. 날렵하게 허리가 휜 초승달도 보인다. 그렇게 캄캄한 밤하늘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동안 영감님도 나도 몇 번인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채운다. “그때가 한국전쟁 직후였으니까, 당시만 해도 난 아무것도 모르는 열 살짜리 철부지 꼬마였지.”
영감님은 계속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눈빛도 분위기만큼이나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아빠는 전형적인 룸펜이었어. 가족 말고는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지. 두문불출, 매일 책이나 신문을 읽으며 방에서만 지내셨어. 그리고 매일 혼자서 술을 드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술심부름을 해야 했지. 그래도 일제 말기에는 유학까지 갔다 온 인텔리였다고 해. 머리 하나는 정말 똑똑하셨지. 당연히 배운 것도 많았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오뉴월 두엄처럼 푹푹 썩어가고 있는 거야. 행상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던 엄마 입장에서 보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노릇이었지. 하지만 그때가 벌써 육십몇 년 전이야. 당시만 해도 남편은 하늘이었어. 거기다 대고 쓴소리 한마디 할 수 있나, 어디? 가끔씩 한참 돌려서 쌀이 떨어졌네, 월동 준비를 해야 하는데 큰일이네, 이렇게 운이나 띄우는 게 다였어. 그때마다 아빠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둥, 돈을 벌려고 했으면 장사를 배웠지 공부를 했겠느냐는 둥, 막 화를 내셨지. 공부는 어디까지나 공부라는 거야. 그때는 그 말이 멋져 보였어. 사실 난 책이나 신문을 읽고 계시는 아빠가 자랑스러웠거든. 하지만 세월이 흐른 다음에 생각해보니까 그게 다 핑계였더라고.”
“핑계요?”
“응, 핑계. 아빠가 두문불출하며 지냈던 이유는 따로 있었어. 아빠는 시대와 세상을 혐오하고 있었던 거야.”
당시만 해도 자유당 시절이었으니까 꼬마 영감님의 부친께서는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비운의 지식인이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아빠가 혐오한 건 시대와 세상만이 아니었어.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느끼고 계셨지. 정의가 뭔지,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거기서 오는 무력감 때문에 아빠는 괴로워했지. 지식과 지성이라는 게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던 시절이야. 아니, 어쩌면 지식과 지성은 무거운 짐이었을지도 몰라. 개인이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 말이야. 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겠지. 그래서 아빠는 골방에 틀어박힌 채 매일 술만 마셨던 거야. 그러다 술에 취하면 계속 한숨만 쉬고 말이야. 그건 어쩌면 일종의 자학이었을지도 몰라. 아무튼 아빠는 그렇게 하루하루 여위어갔어.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까맣게 타들어갔지. 하지만 눈빛만은 늘 형형했어. 육십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멋져. 혹시 시인 김수영 알아? 아빠 눈빛이 그랬어.”
김수영 시인의 사진이라면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깊게 파인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시인의 형형한 눈빛이 무척 인상적이었다는 기억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아빠가 증발해버린 거야.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지. 아빠가 아끼던 소지품들도 고스란히 제자리에 놓여 있었어. 매일 들고 다니던 담배 파이프만 빼고 말이야. 그 바람에 동네가 발칵 뒤집혔지. 그때가 한국전쟁 직후잖아. 빨갱이니, 무장공비니 하면서 한창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시절이었거든. 북으로 끌려갔다는 소리도 있고, 자진해서 월북했다는 소리도 있고, 아무튼 이런저런 소문 때문에 시끄러웠어. 유학 시절 같이 공부하던 여자와 도망쳤을 거라는 소문도 있었지. 엄마는 계속 울기만 했어. 그날이 바로 1960년 4월 19일이야.”
“설마…… 그 4․19요?”
“그래, 맞아. 그 4․19야. 그날 나는 집 근처 골목을 누비며 신 나게 놀고 있었어. 총성만 울리지 않았어도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는 일은 없었을 거야. 장독 몇 개 있고 빨래만 겨우 널 수 있는 좁은 옥상이었지만 그래도 올라가면 꽤 멀리까지 보였어. 총성을 듣고 처음에는 그게 불꽃놀이인 줄 알았던 거야. 그래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성큼성큼 신 나게 뛰어 올라갔던 거지.”
옥상에 올라가보니 꼬마 영감님의 부친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장독 위에 앉아 계셨다고. 그리고 부친의 오른손 끝에 들린 담배 파이프가 모락모락 한 줄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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