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79화>
“물론 시간은 계속 흘러가. 정권이 바뀌기도 하고 깜짝 놀랄 만큼 새로운 물건이 나오기도 해.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어느 시대나 비슷비슷한 법이거든.”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는 한적한 밤, 술잔을 나누며 마주 앉은 영감님의 이야기가 쓴 소주처럼 독하게 귓바퀴를 타고 흘러든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발붙일 땅을 찾지 못하면 붕이 되는 게 아닐까? 우리 아빠도 그랬고 나도 그랬어. 내가 보기엔 너도 마찬가지야. 돈이 있어? 스펙이 있어? 그렇다고 능력이 좋아? 집안이 빵빵해? 대한민국처럼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가 하나도 없잖아. 넌 네가 경쟁력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해?”
항문 건강에 대한 자신감뿐이었다. 하지만 자위회사를 그만둔 지금, 그 자신감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경쟁력이 없는 인간은 도태될 수밖에 없어. 너처럼 말이야. 존재감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몸무게도 잃어버리는 거지.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 나 같은 인간이 어디 한둘이랴. 돈 없고, 스펙 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인간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묻어가거나 쓸려가면서 더러는 도태되기도 하고 낙오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몸무게를 잃고 붕 하늘로 날아가버린다면 대한민국에는 과연 몇 사람이나 남을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모두 붕이 되는 건 아니고…….”
“그럼요?”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당하게 되거든. 돈 못 벌어온다고 바가지 긁는 마누라에, 직장 상사는 괜히 꼬투리 잡아서 고춧가루 뿌리지, 입사 동기가 자기보다 먼저 진급하면 한숨밖에 안 나와. 그래서 사람들이 화장실 같은 곳에 몰래 숨어서 문 걸어 잠그고 우는 거야.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 퍼마시면서 멍멍개가 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그러고 나면 잊어. 그냥 재수 없어서 똥 밟은 거다, 미친개한테 물린 셈 치자, 이렇게 생각하고 말거든. 자기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어금니 악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악착같이 살아보리라 다짐해. 그러니까 붕이 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거야.”
붕이 되는 건 그렇지 못한 인간들이다.
내가 그랬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은 참 이상한 나라였다. 땅덩어리는 좁은데 똑똑하고 잘난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유학파와 붙으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질리고 주눅이 들었다. 북극에 에어컨을 팔고 아프리카에 전기난로를 수출하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단단한 바위처럼 빈틈이 없었다. 아무리 계란을 던져도 깨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바위에 비하면 계란은 얼마나 쓸모없고 나약한 존재인가, 인정하고 말았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마음만은 편안했다. 가드를 올리며 버틸 필요도 없고, 상대 선수를 쓰러트리기 위해 주먹을 뻗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편안한 자세로 사각의 링 위에 누워 있었다. 더 이상 맞을 일이 없어서 좋았고, 더 이상 때릴 필요도 없어서 좋았다.
“네가 붕이 된 건 그래서 아닐까?”
악착같이 살면 되는 건가? 쓸모없지만 쓸모없지 않다고 박박 우기면서 끝까지 버티면 되는 건가?
“할 수 있겠어?”
얼굴에 두 겹 세 겹 철판을 깔면 된다.
“말이 쉽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남들도 모두 그렇게 살고 있다.
“괜히 무리하지 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다. 무리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나는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계속 붕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어쩌면 얼굴에 철판 깔고 무리하면서 사는 것보다 행복할지도 몰라.”
너무 낙천적인 생각 아닐까?
“비관적인 생각보다 낫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인상 쓰지 말고 웃어.”
웃어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웃을 일이 없어서 인상만 쓰고 다녔다.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야. 웃어야 웃을 일이 생기는 거야.”
하긴 웃는 얼굴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눈앞이 캄캄한데, 먹고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한데, 영감님의 웃는 얼굴 때문일까? 요만큼이지만 그래도 기운이 난다. 아, 영감님의 스마일은 언제 봐도 세계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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