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84화>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말이야. 내가 원래는 중소기업의 CEO였더랬어. 규모는 작았지만, 그래도 그 바닥에서는 제법 탄탄하고 내실 있는 업체로 통했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참 좋았어요. 직원들 거느리면서 사장님 소리도 들었으니까. 여우 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얘들에, 남부러울 게 없었지. 그런데 욕심이 문제야. 직원 수도 늘리고 싶고, 사업체 규모도 키우고 싶고……. 그래서 주식에 손을 댔어. 물론 무작정 들이댄 건 아니야. 주식 쪽에서 일을 하는 친구 녀석이 있었거든. 사두면 무조건 돈이 된다는데 솔깃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어?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끌어다가 한곳에 올인했지. 거기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거야. 알고 보니까 그게 작전주더라고.
생각해봐. 자고 일어나면 주식이 반 토막 나 있는 거야. 정말 악몽을 꾸는 것 같더라니까. 한 주당 얼마씩 팍팍 곤두박질치는데, 이건 피가 마르고 애간장이 타들어가. 당장 팔아치울까도 여러 번 생각했어.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래? 손해 본 게 있으니까 본전 생각도 나지, 주위에서는 지금이 밑바닥 시세라고 떠들어대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은데 될 것 같은데 하면서 안고 가는 게 사람 마음이더란 말이야.
나중에는 회사 돈까지 끌어다 박았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거지. 몇 번 그렇게 말아먹고 나니까 하늘이 정말 노래.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더라고. 한번은 술을 진탕 마시고 건물 옥상에 올라간 적도 있었어. 눈 딱 감고 뛰어내릴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살짝 실눈을 떴지 뭐야. 무지 높더라고. 덜컥 겁이 나더만. 마누라하고 애들 얼굴도 떠올라. 내가 죽으면 식구들은 어떻게 먹고사나, 생각하니까 계속 눈물만 나는 거야. 못 뛰어내리겠더라고. 그냥 울다 내려왔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을 누르는데, 정말 만감이 교차하더만.
그렇게 한 1년쯤 버텼나? 공고 나와서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업이야. 내 청춘을 모두 불태웠다고.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잘 때도 일만 했어. 그렇게 일궈낸 사업체가 그 1년 만에 거덜 나버린 거야. 그때는 정말 정신이 번쩍 들데. 주식의 주 자만 들어도 치가 떨려요. 그때부터는 뉴스를 봐도 주식동향이 나오면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
결국 주식을 정리했어. 끌어다 쓴 빚을 갚고 나니까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사원들의 밀린 월급과 퇴직수당은 전세금을 빼서 해결했어.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그래도 마음만은 홀가분해. 숨이 탁 트이는 게 살 것 같더라고. 사람은 역시 마음이 편한 게 최고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마누라 생각은 좀 달랐었나 봐.
“여보,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이혼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 애들이 둘씩이나 있었거든. 아무리 힘들어도 애들 얼굴 보면서 이겨낼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고. 아내는 원래 속이 깊은 여자야. 생각을 많이 해. 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고집이 있었어. 이혼 이야기를 꺼낼 때도 그랬지.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어요. 찬바람이 쌩쌩 불어. 떡하니 이혼서류를 내밀면서 거기에 도장을 찍으라는 거야. 지은 죄가 있으니까 일단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지. 애들을 봐서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며 눈물도 흘렸어. 하지만 그게 통하지가 않더라고. 댁이 나를 언제 봤다고 이러느냐는 식인 거야.
사랑? 물론 사랑했겠지. 그러니까 결혼도 했고.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사랑도 돈이 있어야 사랑이야.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들어봐.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돼봐. 사랑 같은 소리는 안 나와. 그걸 알기 때문에 도장을 찍었어. 어디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지.
“여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만 한 여자도 없었어. 하지만 너무 힘드니까, 자기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겠지. 애들 데리고 친정에 가던 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뚝뚝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데, 내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 내려서…….
자, 한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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