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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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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85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애잔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 이곳은 구둣주걱 아저씨의 주거공간에서 계단으로 다섯 개 층 올라온 건물 옥상이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지하 단칸방에 바이브레이터 박스를 내려놓자마자 구둣주걱 아저씨가 술이나 한잔하자고 해서 여기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그냥 평범한 옥상이다. 사방이 모텔 건물들로 막혀 있어서 전망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좀 답답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아늑하다고 생각하면 아늑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비닐 장판을 씌운 널찍한 평상도 있다. 구둣주걱 아저씨와 나는 지금 그 평상에 마주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있다. 참 오붓한 술자리다. 분위기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모텔 간판의 네온사인이 총천연색 조명이 되어 은은하게 비추고, 가끔씩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이마에 맺혀 있는 땀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슈퍼에서 사온 소주 몇 병이 검은 비닐봉지에 그대로 싸여 있고, 구둣주걱 아저씨가 직접 구운 오징어가 먹기 좋은 크기로 길게 찢겨 있다. 새우 맛 과자와 몸을 꼬고 있는 과자도 소주를 살 때 같이 샀다.
“자, 한잔해.”
소주가 찰랑대는 종이컵을 들고 구둣주걱 아저씨와 건배한다. 오늘따라 술이 쓰다. 그래도 일단은 비우고 채운다. 왠지 구둣주걱 아저씨와의 이 술자리, 방금 마신 소주처럼 굉장히 쓰디쓸 것만 같다.
회사는 부도났지, 가진 건 없지, 그렇게 이혼까지 당하고 나니까 정말 눈앞이 막막하더라고. 나라는 인간이 뭔가? 싶어.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그 전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마누라와 애들 생각하며 버텼어.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없는 거야. 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잖아. 많이 외롭더만. 아직 결혼 안 했지?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막막함,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그 쓸쓸함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모를 거야.
이혼하고 나서는 죽 여기서 혼자 살았어. 한동안은 정말 나사 빠진 놈처럼 지냈지. 밥도 안 먹고 만날 술만 마셨어. 안주도 없이 말이야. 그렇게 술에 취하면 저절로 욕이 나와. 이놈이고 저놈이고 모두 씨팔 새끼들 같았거든. 주식 하라고 꼬드긴 친구 새끼가 제일 미웠어. 돈 많은 놈들도 밉고, 행복한 놈들도 밉고, 밝은 미래가 있는 놈들도 전부 미웠지. 나만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것 같았으니까. 좆같은 세상 확 망해버려라, 이렇게 원망만 하게 되더라고. 그때는 매일 술이었지. 술이 깨면 괴로우니까 자기 전에 마시고 일어나자마자 또 마시고, 술기운이 달아날까 봐 중간중간에 죽어라고 계속 퍼마셔댔어.
한번은 이틀인가? 사흘인가?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어. 술 때문에 말이야. 눈을 뜨고 보니까 방구석에 누워 있더라고. 지금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보고 싶었어. 얼굴에 뼈밖에 없더만. 피부도 새까맣게 탔고 말이야. 겁나지. 너 같으면 겁이 안 나겠냐? 피부가 까맣게 탄 건 간이 안 좋아서 그런 거거든. 벌써 배 타고 반쯤 요단강을 건넌 느낌이야. 술을 끊는 건 어려워. 혼자 사니까 술 생각도 그만큼 많이 나고. 하지만 그날부로 술을 조금씩 줄였어. 가끔씩 운동도 하고 말이야.
물론 요즘도 가끔 답답할 때면 혼자서 여기 이렇게 나와 한두 병씩 술을 마셔. 하루 종일 지하에 틀어박혀서 지내다 보면 숨이 탁탁 막히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 창문이 없으니까 공기도 나쁘지, 공기가 나쁘니까 건강에도 안 좋아. 그래서 여기를 뚫게 된 거야. 아무래도 지하보다는 낫지. 그래도 여기가 명색이 야외거든. 달도 보이고, 별도 보이고, 평상까지 있으니까 술 한잔 걸치기에는 여기가 딱이야. 낮에는 일광욕도 즐길 수 있어.
그리고 여기 이렇게 떡하니 앉아서 사람들이 하는 짓을 구경하잖아, 그럼 그게 웬만한 스포츠 경기보다 훨씬 흥미진진해. 각본 없는 드라마가 따로 없어요. 여기가 모텔촌이잖아. 보이는 게 전부 모텔이야. 저기 보이지? 저기가 모텔촌 진입로거든. 조금만 더 있어봐. 그럼 저 골목으로 남자 여자 짝을 지어서 쌍쌍이 몰려들 거거든. 그런 커플들을 여기 앉아서 구경하고 있으면 아주 재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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