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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24 09:37 수정 : 2014.12.24 09:37

강태식 소설 <87화>



“자기야, 나 너무 힘들어. 우리 여기 들어가서 잠깐 쉬었다 가.”

무슨 여자가 화통을 삶아 먹었나? 저기서 하는 말이 여기까지 다 들리더만. 산에 올라가서 야호! 메아리를 부르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말이야. 목소리를 들으니까 맞다, 그 여자다! 번쩍 생각이 나는 거야. 그래, 분명히 그 여자야. 탁 하고 무릎을 쳤지. 아무리 봐도 그 여자였어. 지금 너하고 내가 앉아 있는 이 건물 있잖아. 바로 이 4층짜리 건물 소유주의 사모님 말이야.

물론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건물 있겠다, 돈 있겠다, 밤마다 늙은 서방 닦달하며 괴롭혀봤자 힘만 빠지고 실망스럽기만 하지 불붙은 욕정은 채워지지 않을 테고, 능력 있고 시간 있고 몸이 받쳐줄 때 어린놈 하나 물어다가 쪽쪽 맛있게 빨아먹으면, 사모님은 생활에 활력이 넘쳐서 좋아, 어린놈은 용돈 타 쓰니까 좋아,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돈이 풀리니까 시장경제에 도움이 돼서 좋아, 아무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두루두루 좋은 일이니까 그때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말이야. 이 띠동갑 커플, 해도 해도 너무하더라고. 하루도 안 빠지고 꼬박꼬박 출석부에 도장을 찍으면서 떡 치러 오는 거야. 계속 눈앞에서 알짱거리니까 이것들 봐라? 생각이 달라지데.

왠지 억울하더라고. 화도 나고 말이야. 매일 와서 떡 치니까 좋으냐? 두루두루 좋은 일 하면서 붙어먹으니까 좋아? 그럼 난 뭐냐? 왜 나만 쏙 빼놓고 너희들끼리만 떡 치고 붙어먹으면서 좋아하는 거냐? 이렇게 생각하니까 억울하고 화가 나서 돌아버리겠더만. 아니꼽고 더럽고 배 아파서 보고만 있을 수 없더라고. 다 된 밥에 확 코를 풀어버려? 그때는 정말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보이는 게 없었어. 거칠고 깊숙하게 태클 한번 들어가? 그냥 눈 한번 질끈 감고 미친 척 한번 해봐?

“안녕하세요, 사모님?”

어지간히 취해 있었나 봐. 겁나는 게 없더만. 여기 이 평상 위에 떡하니 올라서서 막 모텔 안으로 사라지려는 건물주 사모님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큰 소리로 외쳤지.

“사장님께서도 잘 계시지요?”

어떻게 된 여자가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도 받아줄 생각을 안 해. 대낮에 도깨비를 본 얼굴이더라고. 그런 얼굴로 잠깐 이쪽을 쳐다보더니 왔던 길로 몸을 돌려 죽어라고 뛰기 시작하는 거야. 뒤뚱뒤뚱하다가 퍽! 제정신이 아니더만. 몇 걸음 뛰지도 못하고 길바닥에 그대로 슬라이딩하는데, 그게 또 아주 가관이에요. 뒤따라가던 어린놈이 부축해주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못했을 거야. 절뚝절뚝, 부상병처럼 실려나가는 사모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왜 그랬는지 몰라. 속이 아주 후련해지더라고. 10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쏴악 내려가는 것처럼 유쾌, 통쾌, 상쾌하더라니까.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깐이야. 막상 저질러놓고 보니까 눈앞이 캄캄하니 후회가 되는 거라. 술이 깨자마자 아차! 싶더라고. 당장 무슨 생각이 먼저 드는 줄 알아? 이거 이러다가 쫓겨나는 거 아니야, 내가 지금 겁대가리도 없이 건물주 사모에게 태클을 날린 거지,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 나라가 이래서 안 돼요. 생각해보면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거든. 여기가 방앗간이야, 뭐야? 누가 새파랗게 어린놈 옆구리에 척 하니 끼고 자기 영감 건물 근처에서 떡 치래? 난 그냥 인사만 한 것뿐이라고. 사모님은 안녕하시냐? 사장님께서도 별 탈 없이 무강하시냐? 인사한 게 죄야? 예로부터 이 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잖아. 그럼 말이야. 아는 사람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인사를 하고 아는 척을 하는 게 이 나라에 사는 우리의 도리가 아니겠느냔 말이야. 내 말이 틀려? 세입자는 건물주 사모에게 인사도 못 하는 거냐고? 잘못한 건 건물주 사모님인데,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세입자가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건데? 이 나라 현실이 이래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씨팔, 정말 좆같은 삼천리금수강산이라니까.

아무튼 다음 날은 정말 눈을 뜨자마자 지옥 같았어. 언제 쫓겨날지 몰라 앉아서도 일어나서도 누워서도 불안불안한 거야.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게 생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따로 없어요.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여기 앉아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셔대기 시작했지. 안주도 없이 강소주를 마셔서 그랬나, 금방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라고. 그런데 취하면 취할수록 가슴만 답답해지는 거야. 길바닥에 나앉을 생각을 하니까 억장이 무너지고 한숨만 나오는 거 있지. 아직 술이 덜 취해서 그런가? 싶었어. 그래서 아무 생각이 안 날 때까지, 인사불성이 돼서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볼 때까지 계속 마셨지.

그렇게 마시다 보니까 어느새 밤이야. 이만큼 취했는데도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래서 이제 그만 내려갈까 하고 술병을 치우고 있는데, 아까 여기 올라올 때 열고 들어온 저기 저 문 보이지? 저 문이 스르르 열리더라고. 깜짝 놀랐어. 검은 그림자가 기웃대면서 주춤주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야. 맞춰봐. 그게 누구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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