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88화>
나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어. 술도 취했겠다, 밤이 되니까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는 게 있어야 말이지. 그냥 옥상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온 사람인 줄 알았어. 장독대도 있고, 빨랫줄도 있고 하니까,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으면 가끔 사람들이 볼일을 보러 올라오거든.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라 만나면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는 사이야.
“빨래 걷으러 오셨나 봐요?”
그런데 좀 이상했어. 이쪽에서 인사를 했는데 저쪽에서 아무 대답이 없는 거야. 대신 작게 기어드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라고.
“저예요…….”
저가 누구신가? 하고 자세히 봤네. 또 한 번 깜짝 놀랐어. 건물주 사모께서 직접 여기 옥상까지 왕림하신 거야.
“안녕하세요, 사모님?”
술이 확 깨는 게 정신이 번쩍 들더만. 이등병처럼 평상에서 벌떡 일어나 군기가 꽉 든 목소리로 우선 다짜고짜 인사부터 했지.
“예, 안녕하세요? 괜찮으시면…… 제가 잠깐 여기 앉아도 될까요?”
목소리가 너무 나긋나긋해. 말하는 태도도 지나치게 공손한 저자세고. 앉아도 될까요? 물어보는데 할 말이 없더만. 이 건물이 다 그 사모의 영감 거잖아. 마음만 먹으면 이 건물 전체를 순식간에 철거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건물로 재건축할 수도 있는 건물주 사모님이 나처럼 건물 지하에 파묻혀 사는 두더지 같은 인간에게 허락을, 그것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저자세까지 취하시면서 이런 지저분하고 누추하고 평민적인 평상에 그 고귀하고 위엄 있고 귀족적인 엉덩이를 착지시켜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하시다니……. 정말 너무 송구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더만. 나는 잽싸게 사모님의 엉덩이가 안착할 거라고 예상되는 지점을 포착한 뒤, 거기에 쌓여 있는 먼지들을 손으로 쓸어냈어. 세입자라는 신분에 시건방져 보일까 봐 앉으시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지.
“혼자서…… 약주 하고 계셨나 봐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분명 아니었어. 혼자뿐이지, 빈 소주병에 술잔도 하나뿐이지, 투명인간이랑 주거니 받거니 대작한 것도 아니고, 그건 누가 봐도 지지리 궁상떨면서 혼자 마신 게 분명해. 그런데도 묻는 거야. 그럼 이유는 뻔한 거지. 이거 뭔가 할 이야기가 있어도 단단히 있겠구나 싶더라고.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한잔 주실래요?”
나한테 왜 자꾸만 이러시나?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더만. 사모가 인상을 구기면서 술잔을 내미는데, 이게 또 풍기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닌 거야. 뭐랄까? 고독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기품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인생의 쓴맛, 단맛 다 겪어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은 표정이었어. 저런 표정으로 방 빼라고 하면 밑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나 같은 낮은 포복 인생이 과연 울며불며 매달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
그래도 일단은 술잔을 채웠어. 두 손으로 깍듯하게 말이야. 사모가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이번에는 술잔을 나한테 건네더라고.
“제 술도 한잔 받으세요.”
“예? 아, 예.”
사모가 술을 따르는데, 잔을 들고 있는 손이 계속 덜덜덜 떨리는 거야. 왜 첩보영화 같은 데서 보면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을 요원들이 와서 제거하잖아. 자꾸만 그런 장면이 떠올랐어. 아, 사모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도 이렇게 제거당하는구나, 어쩌면 지금 이 술이 여기서 마시는 마지막 한 잔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무서워서 계속 손이 떨리더라고.
“계약할 때 한번 뵙고 오늘이 처음이죠? 찾아뵌다, 찾아뵌다 늘 생각은 하면서도 여유가 없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사시기는 좀 어떠세요?”
“아주 좋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예.”
사모가 계속 말을 빙빙 돌렸어. 온수는 잘 나오느냐? 하수구가 막히는 일은 없느냐? 지하라 습하지만 제습기를 틀어놓으면 괜찮다, 나중에는 벽지하고 장판을 새로 해주겠다는 거야. 예, 예,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기만 했지. 본론이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더만. 그래서 쫓아내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헛갈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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