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
강태식 소설 <89화>
“오늘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라…….”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귀를 쫑긋 세웠어. 이다음부터가 드디어 본론이었으니까.
“어제요……. 같이 있던 애가 제 조카거든요…….”
조카는 무슨…… 조카뻘이겠지.
“얼마 전에 군대를 제대했는데, 요즘 걔가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는 것 같아서요……. 조용한 곳에 데려가서 차근차근 알아듣게 얘기하면 정신 차리지 않을까 해서요…….”
너 같으면 믿겠냐? 조카랑 팔짱 끼고 모텔 방에 들어가서 인생 상담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말이야. 그래도 이쪽은 세입자, 저쪽은 건물주의 사모거든.
“아, 예…….”
그 전날 맨땅에 안면 슬라이딩을 하면서 갈렸는지 이마와 코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데, 보고 있으니까 참 안됐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괜히 엉뚱한 오해를 하고 계실 것 같아서……. 물론 교양도 있으시고 점잖으셔서 절대 그런 경박한 상상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오해를 하고 계시다면 제 쪽에서 먼저 찾아뵙고 해명해드리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어서……. 아, 참! 그리고 이건…… 얼마 안 되는 약소한 성의 표시지만 그래도 이번 오해를 완전히 풀어주십사 하는 뜻에서…….”
이렇게 말하고는 평상 위에 두툼한 봉투를 툭, 하고 내려놓더니 슥, 내 앞으로 미는 거야. 딱 봐도 묵직하더라고.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드니까 두께가 이래. 바로 감이 왔지. 입막음용 돈 봉투야. 얼마나 넣으셨나? 궁금해서 속을 슬쩍 들춰봤네. 색깔을 보니까 만 원짜리 현찰권은 아니더라고. 모두 10만 원짜리 수표였어. 그것도 에누리 없이 백 장! 그럼 그게 얼마야? 그래, 자그마치 1,000만 원이야. 너무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지더라고. 그때는 정말 턱이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지…….”
“왜, 싫으세요? 이렇게까지 부탁드리는데……. 혹시 액수가 적어서 오해를 푸시기가 어려우시면…….”
“아…… 아닙니다. 이렇게 오해가 풀리니까 제 마음도 한결 가볍습니다.”
“오해를 풀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럼 전 그렇게 알고 이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양 있으시고 점잖으신 분이니까 믿어도 되겠지요?”
“아무렴요. 조카분께서도 하루빨리 마음을 잡으셨으면 좋겠네요.”
“앞으로도 알아듣게 잘 얘기해볼 생각이에요. 그럼 전…….”
“계단이 어둡습니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사모가 내려간 다음, 다시 한번 한 장 한 장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헤아려봤어. 10만 원짜리 수표로 백 장, 틀림없는 1,000만 원이야. 한 달에 칠팔십 버는 놈들 1년 치 연봉이라고. 그런 거금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거야. 현실감이 없더만. 누구는 1,000만 원에 벌벌 떠는데, 누구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푼돈이야. 세상 참, 좆같네,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
하여간 있는 놈들이라는 게 그래.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든다니까. 구려도 엄청 구려요. 아닌 말로 이 나라에서 건물 있고 땅 있고 떵떵거리며 사는 놈들 중에서 정말 자기 힘으로 정정당당하고 떳떳하게,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는 일 없이 따박따박 지킬 거 지켜가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그렇게 돈 번 놈들이 몇 놈이나 될 것 같냐고? 나는 거의 없다고 봐. 아무튼 탈세에 사기에 뇌물수수에, 야합과 편법은 기본이고, 한탕주의와 돈이면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로 무장해서는, 돈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처바르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이야. 명품 빼입고 외제 차 몰고 다니면서 없는 놈들 무시하는 걸 행복이라고 여겨요. 자기들 때문에 나라가 썩고, 사회가 병들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불행해하는데 혼자서만 배불리 잘 먹고 따시게 잘 입으면 장땡이냔 말이야. 왜, 내 말이 틀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말이야,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수단과 방법 안 가리면서, 그렇게 버는 건 아니잖아.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래. 그런 식으로 플레이하면 안 되는 거잖아. 돈지랄하는 건 좋아. 하지만 없는 사람들 생각도 좀 하면서 적당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당장 불로소득 올릴 때는 그래도 와, 이거 수입입네 싶어서 좋아라 했지.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고, 스팀 들어오고, 뚜껑 열릴 노릇이더라만.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