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2.30 09:28 수정 : 2014.12.30 09:28

강태식 소설 <90화>



뭐? 그래서 삼킨 돈 토해내고 사모님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건물주에게 이실직고했냐고? 야,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냐? 눈먼 돈을 돌려주게. 너 같으면 양심상 이런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대뜸 돌려줬겠다? 따지고 들어가면 그렇다는 거야, 따지고 들어가면. 양심 때문에 자기 앞으로 굴러온 거금을, 상대편 골문을 향해 프리킥을 날리는 축구선수처럼 뻥 질러버릴 인간은 세상에 몇 명 안 되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게 안 되니까, 그게 되는 사람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위인이 되고 하는 거 아니겠어? 넌 내가 위인처럼 보이냐?

그리고 사람이라는 건 말이야, 피와 뼈와 살로 조합된 하나의 유기체거든. 이걸 우리말로는 몸, 한자로는 육체라고 하는데, 이 육체라는 놈은 말이야, 항상 영양을 공급해줘야 살 수가 있어요. 매일 관리해주고, 계절에 맞춰서 그때그때 옷도 입혀주고, 눕기도 하고 자기도 해야 하니까 집도 장만해줘야 하고……. 그런데 이게 다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고도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이야기야. 특히 우리 같은 일개 서민들은 더해. 알량한 양심 내세우면서 정직하게 살다가는 제명에 못 죽는다니까. 막말로, 양심이 밥 먹여줘? 목숨보다 중요하냐고? 물론 중요할 수도 있지. 가치관의 차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양심보다 중요하게 여기거든.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 중 한 명이고. 그래서 꿀꺽한 거야. 솔직히 건물주 사모한테 그깟 1,000만 원이 어디 돈 축에나 들겠어?

다음 날부터 소주 대신 양주나 맥주를 마셨어. 안주도 과자 부스러기 대신 요기가 될 만한 육류로 바꾸고. 그래도 한잔할 때는, 주종이 뭐든, 안주로 뭘 먹든, 여기 이렇게 올라와서 마셨지. 만날 혼자서만 마시다 보니까 여자 끼고 안주 받아먹는 것도 적성에 안 맞아. 그렇다고 똥폼 잡으면서 바에 앉아 홀짝거리기도 뭣하고. 게다가 한잔 걸칠 땐 모텔촌 구경만 한 눈요기도 없거든. 은은한 조명이 분위기 살려주지,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심심함 달래주지…….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만한 명당이면 입장료 받고 영업해도 줄 서서 기다릴 거야.

그런데 주종을 개선해서 그런가? 그때부터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어. 안주의 질이 향상되면서 갑자기 의식 있는 인간으로 변했는지도 몰라. 아무튼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랄까? 사모의 돈을 꿀꺽한 다음에 알았어. 이 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말이야. 착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고 욕심 많은 놈들만 떵떵거리면서 잘살아. 용서할 수 없었어.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내가 어릴 때부터 홍길동을 존경했거든. 로빈 후드라면 환장을 했어요. 나라고 그렇게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어. 물론 그러다 부수입이 생기면 더 좋고.

우선 망원경을 샀어. 하지만 그냥 망원경 가지고는 어림도 없거든. 어둠을 꿰뚫고, 자본가들이 타락하는 현장을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는 적외선 망원경이 아니면 안 돼. 물론 일반 문구점에서는 구하기 힘들어. 그래서 인터넷을 구매루트로 이용했지.

검색창에 적외선 망원경이라고 치니까 판매 사이트가 화면 가득 죽 뜨더라고. 적외선 망원경 하면 군사용 아닌가? 역시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인터넷 강국다워. 물건이 많으니까 가격도 비교해보고, 상품평이 있으면 그것도 꼼꼼히 읽어보고, 그러다 그중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제일 괜찮겠다 싶은 상품으로 하나 구입했지.

그런데 괜히 샀어. 망원경이 아무리 적외선이면 뭐해?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는 일이다, 그런 데는 가본 적도 없다, 당사자가 이렇게 오리발을 내밀면 속수무책이거든. 생각해보니까 뭔가 아주 확실한 걸 남길 필요가 있겠더라고. 꼼짝할 수 없는 물증, 움직일 수 없는 증거 같은 거 말이야. 그래서 생각해낸 게 고성능 원거리 디지털카메라야. 이번에도 인터넷으로 구입했어. 거기에 적외선 기능까지 추가하니까, 가격이 정말 장난이 아니더만. 하지만 후회는 없었어. 그립감이 예술이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찰칵, 디지털카메라가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더라고. 역시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돈은 거짓말을 안 해. 아무튼 그렇게 만반의 준비는 모두 끝났어. 이제 여기, 건물 옥상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입질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지.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강태식의 <가드를 올려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