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92화>
“혹시…… 모 대기업에서 부하직원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으며 이러저러한 부서에서 여차여차한 고위간부로 근무하고 계신 아무개 선생님이 사모님의 부군 되시는 분 아닌가요?”
이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해주면 저쪽에서 먼저 흥정을 걸어와. 가격을 결정하고, 거래은행과 계좌번호를 문의하고……. 가끔은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사모들도 더러 있었어.
“계속 물고 늘어지는 건 아니겠죠?”
나는 제비가 아니야. 가정파괴범도 아니고. 입금이 확인되면 사진은 그 자리에서 삭제해. 중소기업을 운영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래. 거래든 흥정이든 양심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내 나름의 경영철학이거든. 마지막에는 그래도 이런 당부 한마디는 반드시 해줘.
“제가 아픔을 겪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가족만큼 소중한 게 없어요. 앞으로는 부군 되시는 분하고만 하시면서 아무쪼록 가정에 충실하세요.”
여자들이 왜 언어에 강하잖아. 사모님들은 이렇게 말로 하면 얼추 알아듣는데, 사장님들은 안 그래요. 꼴에 남자라고 저항이 거세. 막 막말을 해대는데, 교양을 밥 말아 자셨나? 아무튼 매끄럽지가 못해요.
“너 이 새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게 어디다 대고 개수작이야?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유치장 신세 지면서 콩밥 한번 먹어볼래?”
미친개처럼 이렇게 노발대발 짖어대는 분들일수록 가진 것도 잃을 것도 많은 분들이야. 이런 분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보이는 건 무조건 꿀꺽한다는 거야. 토해내기는커녕 트림 한번 안 하고 말이야. 항상 불로소득에 탈세만을 일삼다 보니까, 세금에 대한 개념 자체를 상실하신 거지. 딸뻘이나 손녀뻘 되는 젊은 여자를 쑤셔댔으면 말이야, 맛있게 따먹고 생활에 활력을 찾았으면 말이야, 거기에 맞는 세금을 내야 할 것 아니냐고. 안 그래? 내가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국세청을 대신해서 내가 너희를 응징하리라!
“그렇게 흥분하지 마시고……. 저는 다만 선생님과 상대 여자분의 즐거운 한때를 담은 사진들이 인터넷에 오르면 한창 자라나는 자제분들이나 선생님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사모님, 그리고 사력을 다해 선생님을 보좌하고 있는 부하직원들 할 거 없이 두루두루 검색하며 감상할 텐데, 그렇게 되면 여태까지 쌓아 올린 선생님의 사회적 위상이나 반드시 사수해야 할 은밀한 프라이버시 등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콩밥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렇게 슥 점잖은 목소리로 몇 마디 조언을 해주잖아, 그럼 백이면 백 다 이래.
“아이고, 선생님! 제가 몰라 뵀습니다. 개인적인 억하심정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그러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화 차원에서 돌파구를 마련해보는 게…….”
바로 깨갱, 꼬리를 내리고 선생님 한 번만 살려줍쇼야. 내가 또 마음이 모질지를 못해요. 울며불며 사정하는 걸 들으면 참 안됐다 싶기도 하고. 그래서 돈 얼마를 내가 거래하는 은행의 불러주는 계좌로 입금하면 사진을 모두 삭제하겠다고 알려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뭐, 은혜랄 것까지야 있나. 그래도 매장될 뻔한 사람 하나 내가 살려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게 보람도 있더라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가 참 좋았어요. 남들은 공갈협박범이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난 떳떳했거든. 로빈 후드나 홍길동처럼 확실한 대의명분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수입도 어마어마했어. 한 건당 최소 1,000만 원이야. 한 달에 열 건 이상 뛰었으니까 그때 내 연봉이 못해도 10억 이상 됐을 거야. 부족할 게 없었지. 아파트 한두 채쯤 사는 건 일도 아니었어. 물론 주식은 다시 안 해. 옛날처럼 중소기업을 차리면 차렸지. 그런데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도 없더라고. 쉽게 버니까 계속 쉽게 벌고 싶어. 게다가 사진 몇 장에 전화 한 통이면 아무리 잘나가는 놈들도 아이고,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설설 기지. 그때는 정말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었다니까. 세상이 다 내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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