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94화>
이번에 보낸 세 장의 사진에도 비슷한 장면이 담겨 있더군. 성실하게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내 모습과 모텔로 들어가는 불륜 커플의 모습. 그런데 이 세 장의 사진이 말이야, 촬영 방향이나 높이가 제각각 다 달라. 전방, 후방, 왼쪽 측방에서 한 장씩 찍었는데, 난 무슨 인물 기획 시리즈물인 줄 알았어. 대체 왜 그런 사진들을 보냈을까? 생각해보면 이게 또 고도의 심리전이거든. 언제 어디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다, 모든 방위 모든 각도에서 너 하나만을 주시하고 있다, 나에게 이런 이미지를 강요하고 싶었던 거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야. 그런 의도로 두 번째 우편물을 보낸 거고.
물론 A4용지에 인쇄된 메시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주의사항이었어. 무엇 때문에 그런 개수작을 부리는지 알겠더라고. 뭘 거 같아? 메시지에 친절하게 나와 있는데 모르겠어? 그래, 돈이야. 공갈협박의 현장을 사진에 담아서 그걸 빌미로 공갈협박을 하겠다는 거거든. 동업자 정신 같은 건 애진작에 벌써 엿 바꿔 먹었지롱, 이러면서 메롱, 혓바닥을 내밀 작자야. 나 참.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혀요. 뭐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미풍양속을 자랑하며 상부상조하던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각박해졌구나, 생각하면서 가슴앓이도 많이 했어.
거래은행과 계좌번호를 적어 보낸다. 기간은 72시간. 앞으로 3일! 그 안에 몽땅 토해내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인정사정 안 봐줄 테다!
세 번째 우편물에는 달랑 A4용지 한 장, 이런 메시지만 들어 있었어. 사진을 동봉하는 노력도 안 보이고 말이야. 이건 좀 너무한다, 싶더라고. 사는 게 어려우니까 얼마라도 좀 도와달라고 하면 나도 생각해볼 수 있어. 그런데 이건 몽땅 토해내라는 거야. 아무리 공갈협박이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다 싶더라고. 원래 공갈협박이라는 게 그렇잖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물물교환 같은 거거든. 물론 사진이나 기타 증빙 자료들이 보조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하지만 공갈협박의 ABC는 누가 뭐래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즉 대화라는 거야. 대화를 통해 거래가 시작되고, 흥정이 붙고, 가격이 결정되는 게 공갈협박의 생리니까. 그런데 이 작자는 공갈협박의 기본이 안 돼 있더만.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만 들어요.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지, 이런 고민도 진지하게 안 해보고 말이야. 바로 감이 오더라고. 이 친구는 햇병아리야. 야구로 치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인 드래프트에서 뽑힌,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말이야.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떡하니 문에다 붙여놨지.
까불지 말고 꺼지라는 충고를 하고 싶구먼.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시게나.
열 받았나 봐. 다음 날 바로 반응이 오더라고.
너나 까불지 마! 경찰서에 사진 보내면 넌 그날로 구속이야.
공갈협박으로 들어가봤자 얼마나 산다고……. 게다가 피해자들이 고소를 해야 범죄라는 게 성립되는 거거든. 불륜 사실이 발각되는데 누가 고소를 하겠느냐고.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한심한 친구야. 의욕만 앞섰지 노련미가 없어요. 그래서 협박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선배로서 한 수 가르쳐줬지. 그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미친개처럼 짖어대더라고.
사람 자꾸 빡 돌게 하지 마. 성질나면 확 쑤셔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연장 맛 본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토해내!
공갈협박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발상부터가 벌써 시대착오적이야. 기획이나 사전준비 없이 무작정 덤벼든 것 같았어. 그리고 공갈협박을 하겠다는 사람이 말이야, 자기감정 하나 컨트롤 못 해서 어떻게 할 거야. 볼수록 안타깝더라고. 자네에게는 재능이 없는 것 같네. 유감이지만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군.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보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네.
내가 좀 심했나? 막 자라나는 새싹을 너무 잔인하게 밟아버린 건가? 처음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충격을 심하게 받았는지 A4용지도 사진도 그때부터는 뚝이야. 좀 미안한 마음도 들더라고. 하지만 안 될 놈은 안 되는 거야. 괜히 듣기 좋은 말로 용기를 북돋아봤자 그게 결국은 남의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거든. 지금 당장은 쓰지만 나중에는 그게 다 약이 되는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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