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95화>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 그 친구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 그런데 우리 집 우편함에 편지가 한 통 와 있더라고. 문구점에서 파는 일반 편지봉투에 말이야. 당연히 사진 같은 것도 없었지. 그건 정상적인 유통 단계를 거쳐서 도착한 일반 우편물이었어. 우체국 소인도 착실하게 찍혀 있고 말이야. 그래서 그 친구의 스승이 보낸 편지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가내의 안녕과 귀하의 무궁한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하오며 부족한 글재주로 몇 자 적어 올립니다. 이렇게 서신으로 찾아뵙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근자에 들어 부족한 소생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미련한 아이가 얕은 기량과 미천한 재주만 믿고 이름 높으신 귀하께 크나큰 결례를 범하였다 하기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어 몇 자 글로나마 백배사죄를 올리기 위함입니다.
젊은 혈기에 저지른 짓이니 부디 버릇없다 마시고, 넓으신 아량과 크신 도량으로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바라옵니다. 아울러 차제에는 다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단단히 단속하겠습니다. 못난 스승 밑에 못난 제자가 나온다는 말을 떠올리며 저도 요즘 반성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익히 들어 늘 사모하여왔습니다. 곧 뵈올 날이 있을 것이니 그때 정식으로 인사드릴까 합니다.
욕하는 놈은 안 무서워. 진짜 무서운 놈은 공손하게 머리 숙이면서 따박따박 존댓말 구사하는 놈이지. 다 읽고 나니까 등골이 오싹해지더라고. 과연 스승이야. 레벨이 달라. 이놈은 고수다, 바로 감이 팍 오는 거야. 솔직히 쫄았어. 하지만 나도 만만한 놈은 아니거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일단은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로 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 밤에도 나는 여기 나와서 불륜 커플들의 등장을 기다리며, 카메라를 손에 들고 셔터에 손가락을 건 채, 평상에 엎드려 몸을 숨긴 자세로 잠복대기 중이었지.
“어이, 형씨!”
걸쭉한 목소리로 누가 사람을 부르더라고. 처음에는 그 형씨가 난 줄 몰랐어.
“형씨,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덩치가 산만 한 어깨가 옥상 문을 열고 올라와 있더라고. 인상은 험악하지, 깍두기 머리에, 팔뚝에는 문신까지 새겨져 있는데, 저절로 눈이 아래로 깔리더만.
“저요?”
“형씨, 이런 데서 이런 장난치면 안 되지. 일단 몇 대 맞고 시작합시다.”
그때부터 사람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는데, 내가 무슨 장작이나 샌드백도 아니고, 정말 인정사정이라는 게 없더라고.
“저한테…… 왜 이러세요?”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하잖아. 그런데 입 꼭 다물고 계속 주먹질에 발길질이야.
“제발…… 제발…… 때리지 마세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도 말짱 도루묵이야. 게다가 심지도 굳어요. 골고루 돌려가면서 때리면 좀 좋아. 이건 때린 데 또 때리고, 때린 데 또 때리고……. 아주 악질이더라고.
“으-악, 사람 살려! 으-악, 사람 살려!”
그렇게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몰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으니까 덜컥 겁도 나고 말이야.
“형씨, 앞으로는 이런 장난치지 맙시다. 형씨 때문에 피해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야.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착하게 사쇼.”
그때는 정말 확실하게 배웠어. 어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머릿속에 쏙쏙 박히더라고. 그래서 결심했지. 장난치지 말아야겠다, 착하게 살아야겠다…….
“요 앞에 있는 모텔이 우리 매형 거외다. 형씨가 여기서 장난치는 바람에 매상이 확 줄었다고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아무튼 형씨 때문에 매형 얼굴이 반쪽이 됐시다.”
“아, 그러시구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음에 다시 볼 때는 나나 형씨나 쌍방 모두 좋을 게 없으니까……. 아무튼 이웃사촌끼리 괜한 일로 얼굴 붉히면서 사건사고 만들지 맙시다.”
“아무렴요. 이웃사촌끼리 화목하게 지내야죠.”
“그럼 내가 믿고 가겠시다.”
“바쁘실 텐데 그러셔야지요.”
“참, 형씨!”
“예?”
“뭐, 개인적인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건 아니니까 형씨가 이해하쇼.”
“제가 잘못한 건데요. 이해하죠.”
“초면에 이거 미안하게 됐시다.”
그렇게 어깨를 보내고 아래로 내려왔어. 안 아픈 데가 없고, 안 쑤시는 데가 없고, 멍이 안 든 데가 없더만. 병원에 가서 진단서 끊으면 전치 십몇 주는 그냥 나오겠더라고. 일단 자리 펴고 한번 누우니까 때려죽인대도 못 일어나겠는 거야. 그렇게 끙끙 며칠을 혼자서 앓아누워 있었지. 그리고 한 나흘이나 지났나? 겨우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까 우편물 하나가 와 있더라고. 이번에는 노란색 비닐 서류봉투였어.
귀하의 완전무결할 정도로 깨끗한 대인 관계와 전무하다시피 한 사회적 위치 때문에 부득불 여차여차한 모텔에 제보하여 이번 폭력사태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이란 하수들이나 사용하는 방법임을 소생 또한 모르지 않사오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강의하고 있사오나, 귀하께 정식으로 인사 올릴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결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이 점 머리 숙여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귀하께서 구타당하시는 처참한 장면을 안타깝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같은 편에 동봉하여 보내오니 부디 어설프다 흉보지만 마시고 후학을 아끼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어여삐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늘 건승하시길, 귀하의 전도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쪼이길 먼발치에서나마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기원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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