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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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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98화>
세월이 무심하기가 참 흐르는 물과도 같습니다. 지난번에 잠깐 뵙고 어느덧 닷새가 흘렀습니다. 귀하께서는 그간 무탈하게 잘 계시는지요? 궁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입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귀하에 대한 존경심이 커져만 가는 요즘입니다. 부디…….
일주일 하고 닷새 하면 그게 며칠이야? 자그마치 십이 일이라고. 믿어져? 내가 서른 하고도 여섯 끼니를 굶었다니까. 미라처럼 자리에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데, 문은 분명히 잠가놨거든. 그런데 누가 그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노란 비닐 서류봉투를 전해주더라고.
“먹을 것 좀…….”
냉정해. 불러도 그냥 가버리데. 그때 받은 사진이 꽉 닫혀 있는 문을 밖에서 찍은 거였어. 왤까? 왜 닫혀 있는 문을 찍어 보냈을까? 문이 예뻐서? 그냥 심심해서? 아니. 누가 너희 집 문을 찍어서 보냈다고 생각해봐. 문 앞에다 죽은 고양이를 갖다놓은 것만큼 무서울걸. 으스스했어. 이건 완전히 전의 상실이야. 권투로 치면 카운터펀치고, 야구로 치면 9회 말 투 아웃 풀 카운트 상황에서 맞은 역전 만루 홈런이야. 더 이상의 버티기는 의미가 없었어. 물론 더 버틸 힘도 없었지만 말이야.
항복!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 토해낼 테니까 살려만 주십시오!
문밖에 백기를 내건 그날, 나는 그 작자의 지시에 따라 가진 돈 전부를 모두 토해내고 말았어.
그동안 귀하를 지켜보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귀하의 강인한 인내심과 투철한 정신력이 나태와 안일에만 젖어 있던 소생의 일상에 경종을 울리고, 아울러 살아온 날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소중한 하루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앞서지만 다시금 세상으로, 밝은 빛 속으로 나와 새 출발을 준비하시는 귀하의 앞길에 순풍이 불기를 기원하렵니다. 비록 작별은 슬프지만 저 역시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그날을 기다리렵니다. 앞으로도 귀하께서 계획하시는 모든 일에 찬란한 햇살이 비추길 기원하오며…….
귀하, 귀하, 귀하! 이제 내가 그놈의 귀하 소리만 들으면 아주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려요.
정말 지옥에 끌려갔다 온 기분이었어. 악마 같은 인간에게, 아니지, 아니야.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악마에게 붙잡혀 있다가 겨우겨우 빠져나온 것 같았다니까. 가진 거 몽땅 다, 정말 깨끗하게 싹 다 털렸지. 그런데도 다행이다, 이제 살았다 싶은 거야. 다 필요 없고 라면이나 몇 개 사다가 보글보글 끓여서 김치랑 냠냠냠 맛있게 먹고 싶은 생각뿐이더라니까. 배만 부르면 힘이 날 것 같았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
그래서 구둣주걱 아저씨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하지만 힘이 나지도 않았고, 예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난 이미 고장 나 있었어. 라면 몇 개로는 고칠 수 없는 고장 말이야.”
어디가 부러지거나 피가 난 건 아니었다. 어디가 부러진 거면 깁스를 하면 되고, 피가 난 거면 붕대를 감으면 된다. 하지만 구둣주걱 아저씨는 깁스를 할 수도, 붕대를 감을 수도 없었다. 그때 고장 난 건 구둣주걱 아저씨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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