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100화>
그때가 마침 어중간한 오후였거든. 드문드문 차가 지나가고, 잊을 만하면 한둘씩 사람들이 보여요.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신기했는지 몰라. 와, 처음 보는 차다! 와, 걸어가는 사람이다! 막 서울에 올라온 촌놈처럼 신이 났더랬지. 옷 가게 앞에 서서 진열대 안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어. 마치 지구별에 방문한 외계인처럼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말이야.
“저리 꺼져버려. 이 변태 자식아!”
예쁜 란제리들을 구경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매장 점원이 나와서 막말을 해대더라고. 진열대 유리를 어루만지며 질질 침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는지도 몰라.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았어. 씨익, 웃어주니까 각목 같은 걸 들고 나와서 개 쫓듯이 휘둘러대더만. 일단 뛰었어. 얼굴에 부딪히는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정말 오랜만에 달렸지. 하하하, 저절로 웃음이 나와. 기분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였으니까. 이렇게 좋은데 진작 나올걸, 후회하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등한시했던 지난날을 반성해보기도 했어. 길거리에서 마주친 어떤 작자가 불쑥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나를 보며 씨익,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전 처음 보는 작자였어. 그래서 물었지.
“누구시더라?”
“이거 섭섭합니다. 건제한 모습으로 산책을 즐기시는 귀하의 용안을 뵙고 반가운 마음 감출 길 없어 한달음에 달려온 소생을 알아보지 못하시다니 말입니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더라고. 머릿속에서 쾅, 메가톤 급 핵폭탄이 대폭발을 일으킨 느낌이었어.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핵 폭풍이 밀려오고, 핵 진이 눈처럼 날리고……. 정말 하얗게 초토화된 느낌이었지.
“……상전벽해라고 했던가요.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무상함이 부쩍 피부로 와 닿는 요즘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어. 뛰어야 하는데,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야. 이건 정말 쪽팔린 얘긴데, 갑자기 바지가 축축해지더라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오줌까지 쌌다니까. 다 큰 어른 남자가 말이야.
“그럼 전 이만……. 오늘의 만남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귀하의 전도에 무궁한 광명이 비추길 간곡한 마음으로 기원하오며…….”
그 작자는 씨익, 웃음을 날리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나를 지나쳐 어딘지 모를 곳으로, 악마니까 어쩌면 자기가 사는 지옥으로 사라져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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